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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사물 이야기]밀대

입력 | 2016-11-23 03:00:00


 초등학교 때 살았던 집의 재래식 부엌에서 나는 처음 요리를 시작했다. 연탄을 때던 엄마의 그 부엌에는 요리 도구들이 많았다. 크기가 다른 싸리 채반들, 밥통같이 생긴 제빵기, 크고 둥근 중국식 프라이팬, 양은 냄비, 국자, 밀대. 내가 동생들과 같이 어설프게 빚은 도넛을 튀기고 뽑기와 달고나를 하다 국자를 태워 먹었던 것도 그 부엌에서였다. 엄마가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밀어 멸치 육수에 칼국수를 만들어 주었던 곳도. 그때 엄마의 나무 밀대는 유년 시절의 다른 많은 것처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고, 이제 나는 플라스틱 밀대로 식빵과 롤빵을 만든다.

 향긋한 시나몬과 흑설탕 호두 건포도가 들어가는 시나몬 롤은 가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빵이다. 우리밀과 우유를 넣고 1차 발효를 마친 반죽을 밀대로 민다. 넓게 편 반죽에 필링(속 재료)을 얹고는 김밥 말듯 돌돌 말아 균일한 두께로 9등분한다. 롤빵을 구울 때면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영화 ‘카모메 식당’과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아들의 생일을 앞두고 그녀는 케이크를 주문해 두었다. 생일 오후에 아들은 차에 치여 입원하고 의식이 없는 아들의 병실을 지키다 부부는 교대로 잠깐씩 집에 다녀온다. 그 사흘 동안 빵집 주인은 계속 그 집으로 전화를 걸어 케이크를 잊은 거냐며 메시지를 남긴다. 아들은 죽고,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아무런 사실도 알 리 없는 그 빵집 주인의 항의 전화를 받고는 분노에 휩싸인 채로 한밤에 빵집을 찾아간다. 마침내 그 부부에게 생긴 슬픔을 알게 된 빵집 주인은 위협하듯 손에 들고 있던 밀대를 내려놓고 말한다. “갓 구운 롤빵이라도 좀 드셨으면 싶은데. 드시고 살아내셔야죠. 이럴 땐 먹는 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거든요.” 갑자기 허기를 느낀 부부는 빵집 주인이 막 오븐에서 꺼낸 따뜻하고 달콤한 시나몬 롤빵을 먹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아침이 될 때까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도 주인은 손님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나몬 롤을 굽는다. 같이 빵을 만들고 나눠 먹는 장면은 보기만 해도 위로를 받는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몇 번씩이나 ‘카모메 식당’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보고 읽게 되는 건.

 때때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갓 구운 빵을 나눠 먹고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고 지금보다는 관심을 갖는 일들. 그 밖에 또 무엇이 있을까? 더 나은 생각은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 자, 시나몬 롤이 지금 막 구워졌고 가능한 한 여러 명과 이 소박한 풍미 속에 잠겨 있고 싶다. 매일매일 믿지 못할 일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은 잠시나마 그런 위로의 시간도, 어쩌면 필요하지 않을까.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