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 출판평론가
“책 한 권을 얻으면 반드시 보고 베껴 썼다. 그렇게 읽은 책이 수만 권이며 베껴 쓴 책이 수백 권이다. 어딜 가든 종이, 벼루, 붓, 먹을 갖고 다녔다.” 이덕무(1741∼1793)의 아들 이광규가 부친을 회고한 말이다. 인쇄본을 살 형편이 못 되었던 이덕무는 책을 필사해야 했다. 책을 자주 빌려준 이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책 베껴 쓰는 사람을 보고 부지런함이 지나치다 비웃은 적이 있는데, 나도 그 사람처럼 하다가 손까지 부르텄으니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오.”
서양의 수도원에서는 수도사 사자생(寫字生)들이 성서와 기도서를 비롯한 책들을 정성들여 필사하고 장식하였다. 슈폰하임 수도원 원장으로 귀중 사본(寫本) 수집에 열중했던 요하네스 트리테미우스(1462∼1516)가 사자생을 찬미하며 말했다. “필사를 하는 수도사는 소중한 시간을 가치 있게 쓴다. 필사를 하면서 이해력이 높아진다. 믿음의 불꽃이 밝게 타오른다. 내세에 큰 보상을 받게 된다.”
문일평이 수고스럽게 필사한 이 고종 시대 외교 기록을 지금은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에서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다. 필사의 시대와 복사의 시대를 지나 다운로드의 시대가 되면서,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자료의 양은 넘쳐난다. 하지만 그에 비례하여 이해력과 통찰도 깊어졌을까. 진정한 지식정보화 사회는 지식의 양적 입력과 질적 출력이 비례하는 사회일 것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