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진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의사
폐결핵이라는 진단명을 알려주어야 하는 순간은 매번 낯설다. 낯선 의사 입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낯선 질병 이름을 기억해야만 하는 당사자의 마음은 바쁜 진료실의 의사가 헤아리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내가 왜?’ 특히 아직 젊은 나이에 심각한 정도로 진행되어 뒤늦게 의료기관을 찾은 환자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사연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리라.
시월 이맘때면 떠오르는 특별한 결핵 환자가 있다. 결핵이동검진 일을 하던 어느 날, 책 속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이름은 김해경. 남자 22세. 마산에서 부산 대구를 오가던 고속도로 위 검진버스에서 그의 차트를 펼쳐 보고 그를 마주하고 진찰했을 의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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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이 친구 객담 검사 잘 좀 해 주시고요. 도말 결과 양성 나오면 알려주세요. 선생님, 이분 혈압도 확인해 주시고, X선 사진은 정면상에 측면상도 함께 찍어주세요.”
검은 것은 공기요, 하얀 것은 뼈나 살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펼쳐진 흉부 X선 영상에는 다른 중증 폐결핵 환자들의 것처럼 검은 폐 위에 뭉게뭉게 하얀 구름 꽃이 가득하다. 각각의 폐 덩어리를 감싼 막도 통과해버린 채, 침수로 아수라장이 된 축사처럼 한쪽 구석에는 결핵성 흉수까지 차올랐다. 그 양이 제법 되어, 복부 장기의 음영과도 잘 구별되지 않는다.
“이 상태로 어떻게 지냈어요. 날이 갈수록 힘들었을 텐데.” 아직 사태의 심각성이 덜 와 닿는 듯, 의사의 X선 영상 설명에도 쿨럭쿨럭,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 친구. “어디 요양원이나 결핵병원에라도 가 쉬면서 치료하시는 것이 좋겠어요.” 조마조마한 마음을 막다른 골목에 밀쳐두고선, 소견서의 마지막 줄을 적어 나간다.
본명이 김해경인 천재 시인 이상이 10월에 폐결핵을 진단받은 당시 나이는 22세였다. 지금은 6개월 투약만으로도 완치가 가능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결핵을 치료할 만한 항생제가 없었다. 유일한 치료라곤 볕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는 것뿐. 그러니 진통제와 수면진정제 투약만으로 병세가 악화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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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 결핵제 치료를 받지 않은 결핵환자 두 명 중 한 명은 5년 안에 사망한다. 이상도 결핵진단을 받고 만 5년을 겨우 넘겨 타국의 한 대학 부속병원에서 세상에 작별을 고한다. 향년 28세. 20대의 대부분이 폐결핵 투병이라는 지루한 싸움의 연속이었지만, 천재 작가는 상상과 파격으로 한국 근대문학사의 새 장을 열어젖히고야 만다.
다시 시월, 흰 가운 한 장 걸친 채 나는 한 명의 아해가 되어 서울 서촌 세종마을에 서 있다. 시린 하늘이다. 문화공간이 된 그의 생가에서, 청진기를 꺼내 청년 이상의 가슴팍을 더듬는다. 한글을 물감 삼아 세상에 없던 그림을 그려내던 ‘화가’ 이상. 식민지 조선이라는 프레임 안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근대(모더니즘)를 열망했던 한 젊은 청년의 치열함이 전해져 온다. 다르게 보자. 세상에 없는 눈으로 보자.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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