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진제 완화, 17년간 번번이 무산
▼ 선선해지면… 전기료 개편 없던일로 ▼
“날씨만 선선해지면 좀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최근 20년 가까이 전기료를 둘러싼 논란의 패턴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폭염으로 전기료 누진제 비판이 불거져 정부가 완화 방침을 발표하지만 가을이 찾아와 여론이 잠잠해지면 슬그머니 없었던 일이 돼 버리곤 했다.
정부가 가정용 누진제 완화 카드를 처음 꺼내 든 것은 17년 전인 1999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책연구원인 에너지경제연구원은 당시 정부가 의뢰한 용역 보고서에서 △2003년까지 누진제 완전 폐지 △산업용 전력요금 10% 인상 △전기료 원가 연동제 도입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당시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는 “서민들의 부담이 증가할 수 있다. 여름에 반짝 증가하는 사용량을 조절하면 된다”며 누진제 유지 방침을 고수했다. 전력 당국의 이런 기조는 지금까지도 가정용 누진제에 대한 비판을 방어하는 정부 논리로 활용됐다.
정부 차원에서 누진제 완화를 추진했다가 없던 일로 하는 것은 이후에도 반복됐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8월에는 한국전력이 직접 “2010년까지 누진제를 3단계로 축소하겠다”고 간담회를 통해 공식화했지만 정부가 “고유가로 실행하기 어렵다”며 일축했다.
20년가량에 걸친 누진제 논란은 정부가 에너지 정책에 대한 장기 계획 없이 그때그때 즉흥적 대응을 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누진제 개편을 미룬 핑계도 일관성이 없었다. 2006년에는 ‘고유가에 따른 에너지 절약’을, 2012년엔 ‘안정적 전력 수급’을 위해 누진제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제유가가 배럴당 40달러대로 떨어지고 전력 예비율이 10% 이상으로 높아진 최근에는 “에너지 신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게 누진제 유지의 근거로 제시됐다.
전문가들은 더 이상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를 한시적으로 완화하는 땜질 처방에 그칠 게 아니라 에너지 요금 체계와 수급 정책 전반을 장기적으로 손보는 마스터플랜을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당장 에너지 정책을 둘러싸고 △불합리한 전기요금 체계 개편 △미세먼지 및 온실가스 감축 △신재생에너지 육성 △에너지 취약계층 복지 강화 등 다양한 과제가 떠오르고 있지만 이를 종합적으로 아우를 만한 정부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김진우 연세대 글로벌융합기술원 특임교수(전 에너지경제연구원 원장)는 “그동안 에너지 정책의 큰 줄기는 제대로 잡지 못한 채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로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며 절약만 강조했다”며 “다양한 정책 목표를 담을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 정책을 마련해 에너지 절약 달성은 물론이고 신기후체제에도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이상훈 january@donga.com·신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