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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국제학술지 표지논문 영광 뒤엔, 화려한 그림 한 장

입력 | 2016-07-30 03:00:00

과학 일러스트레이터의 세계




생명과학자들이 선망하는 최상위권 학술지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는 8월호에 나무블록을 룰렛(원반형 도박게임) 형태로 쌓아 올린 그림을 표지에 올릴 예정이다.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팀이 쓴 논문에 들어 있던 작은 원 그래프를 화려한 느낌이 나도록 바꾸어 그린 그림이다.

왼쪽부터 네 장은 이영희 ‘큐브3D그래픽’ 대표가 그린 과학학술지 표지그림, 오른쪽 두 장은 ‘메드아트(MEDART)’ 김현주 작가가 작업한 의학학술지 표지그림.

이 그림은 국내에 몇 안 되는 과학논문 표지작가인 이영희 ‘큐브3D그래픽’ 대표(36)의 작품이다.

4, 5년 전부터 국내 과학자들의 논문은 국제 학술지 표지에 본격적으로 실리기 시작했다. 학계를 선도하는 독창적인 연구 성과가 속속 등장한 덕이다. 이런 흐름에 맞춰 국내에선 과학논문 표지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작가군이 형성되고 있다. 복잡한 과학그림을 직관적이고도 화려하게 그려내는 전문 직업으로 해외 선진국에선 ‘과학 일러스트레이터(Scientific illustrator)’로 불리는 직업이다.



3D 그래픽과 과학 연구 결과의 ‘조합’

국제학술지 표지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작가군이 형성됐다. 과학학술지 표지를 그리는 이영희 ‘큐브3D그래픽’ 대표(첫번째 사진)와 의학학술지 표지를 그리는 ‘메드아트(MEDART)’의 윤관현 대표(아래 사진 왼쪽), 김현주 작가(아래 사진 오른쪽)는 학술지 표지그림 시장의 성장에 기여한 인물들이다. 변지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here@donga.com

국내 표지작가 중 대표적인 인물인 이 대표는 요즘 과학자들의 그림 요청에 정신없이 바쁘다. 국내 명문대와 과학기술원, 정부출연 연구기관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3차원(3D) 그래픽으로 그려 달라는 주문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생활고를 겪을 정도로 힘든 생활을 했다. 짧은 기간에 새로운 직업군이 생겨나면서 그는 본의 아니게 국내 과학학술지 표지그림 시장의 태생을 목격한 증인이 됐다.

이 대표가 표지그림을 그리게 된 건 작은 우연에서 시작됐다. 도시계획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에는 경북 안동의 한 장애인 시설 홍보팀에서 일했다. 2010년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 서른 살에 직장을 그만두고 한 달간 인도 북부 라다크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도중 인도에서 우연히 TV에 나온 내셔널지오그래픽의 3D 그래픽 영상을 보고 ‘이거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린 시절 ‘과학동아’를 보며 과학 세계를 동경했던 그는 과학적 결과물을 3D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일에 왠지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이 대표는 한국으로 돌아와 안동에서 혼자 책과 인터넷 동영상을 보며 3D 그래픽 기술을 독학했다. 그러고는 같은 해 바로 3D 그래픽 회사를 차렸다. 그러나 초기엔 들어오는 일감이 거의 없어 빚만 쌓여갔다.

“폐지나 고철을 주워 팔아 연명했어요. 생선 가공 공장에 이력서를 넣어본 적도 있고요.”

그러다가 기회가 왔다. 혼자 작업한 3D 그래픽을 블로그에 올려놓았는데, 이를 본 이우영 연세대 신소재공학과 교수가 과학논문 표지그림을 그려 달라고 연락해왔다. 논문 그림을 그리는 건 처음이었지만 두 편이 연속으로 국제 학술지 표지에 선정됐고, 과학계에 입소문도 났다. 이후 조금씩 일감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2, 3년 후에는 일주일에 한 건씩 의뢰가 들어왔다. 공장 조감도 같은 다른 3D 그래픽 일감은 줄이고 과학논문 표지그림만 그려도 될 정도가 된 것이다.

2014년이 되자 마침내 ‘잭팟’이 터졌다. 당시 이진석 숙명여대 화학과 교수 등 국내 연구진은 화학 분야 최고의 국제 학술지 ‘앙게반테 케미(Angewandte Chemie)’ 6월호에 논문을 실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연구진에게서 그림 의뢰를 받은 이 대표는 당시 개최를 앞두고 있던 브라질 월드컵에 맞춰 축구공 모양의 그래픽을 그렸다. 그림은 표지에 실리면서 큰 히트를 쳤고, 국내외 과학자들 사이에 ‘표지에 실리게 해주는 작가’로 인지도를 높였다.

이후 주문이 7배 이상 늘었다. 2014년 6월 이후로 지금까지 매일 한 건 이상 그림 의뢰가 들어오고 있다. 이 대표는 지금까지 표지 276건과 다수의 내지 그림, 본문 삽화를 디자인했다. 세계적인 학술지 표지에 논문을 싣는 일은 연구원뿐 아니라 그에게도 큰 영광이다. 홍보에도 꽤 큰 도움이 된다. 자신을 알리지 않아도 논문 표지를 보고 과학자들이 알아서 찾아오기 때문이다.

작품의 가격은 크기나 작품의 질에 따라 50만∼200만 원가량 된다. 최상위 학술지인 ‘사이언스’와 ‘네이처’, 그 자매지의 표지는 그림의 질도 최고급이어야 하는 만큼 가격도 가장 비싸다. 큐브3D그래픽은 1인 기업이었지만 밀려들어오는 물량을 다 소화하지 못해 작년 9월부터는 디자이너 한 명과 일을 나눠 하고 있다.



의학 분야 표지 그리려 해부학 박사 학위 받아

미국 등 선진국의 과학논문 표지작가들은 여러 분야를 다 맡아 그리지 않고 저마다 전문 분야를 두고 있다. 물리, 화학, 세포 생물학, 해부학 등 세부 분야로 나누는 방식이다.

국내에서는 대부분의 작가가 여러 분야를 맡아 그리지만 전문 분야만 그리는 작가도 조금씩 늘고 있다. 의학 일러스트 전문기업 ‘메드아트(MEDART)’의 윤관현 대표(48)와 김현주 작가(42)가 대표적인 사례다. 10년가량 의학 논문 속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려오다 2011년부터 학술지 표지작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20장가량 표지를 그렸다.

윤 대표는 홍익대 회화과를 나왔고, 김 작가는 이화여대 도예과 출신이다. 하지만 의학 그림에는 상당한 전문성이 필요해 대학원에 진학했고 윤 대표는 해부학 박사 학위를, 김 작가는 해부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 대형병원이나 대학, 정부출연연구소, 민간기업의 바이오·의학 연구자들에게서 주로 그림을 의뢰받는다.

의학그림은 과학그림과 달리 ‘등장인물’이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즉, 뼈나 장기, 세포 등 주 소재는 비슷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연구 분야가 세분화되면서 이를 표현하는 데 애를 먹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예컨대 신경세포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 신호를 주고받는 장면을 묘사하는 건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표지시장은 ‘블루오션’으로 통한다. 국내에 이 대표나 윤 대표의 경쟁자는 거의 없다. 이들은 오히려 이 분야에 관심 있는 후배들을 가르치며 시장을 키워 가고 있다.

일을 배우고 싶다며 이 대표를 찾아온 사람은 그동안 30명가량 된다. 그중 두 명이 최근 비슷한 일을 시작했다. 이 대표는 “세계적으로 학술지가 수천 개나 있는데, 내가 하고 있는 건 40, 50개에 불과하다”면서 “아직 시장은 넓다”고 말했다.

윤 대표 역시 최근 학생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올해 3월 신설된 인천가톨릭대 대학원 바이오메디컬아트 전공과정에 초빙교수로 나가 5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좋은 표지그림을 그리려면▼

“정확하고 재미있게” 과학자와 합숙하며 수십 번 고치고 또 고치고





이영희 대표는 경북 포항에 사무실이 있지만 국내외 출장을 자주 다닌다. 그래픽 전문가용으로 제작된 2.7kg짜리 고성능 노트북엔 그동안 그가 모아 온 자료가 전부 들어 있다. 지금까지 작업했던 파일들을 살펴보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언제 어디서나 고민한다. 복잡한 과학을 알기 쉽게 표현하려다 보니 모든 작업은 아이디어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과학자들과의 ‘의견 소통’도 중시된다. 정확하고도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과학자들과 끊임없이 의견을 나눈다.

보통 연구자에게 논문 초록과 대략적인 시안을 받은 다음 초안을 만들고, 이를 끊임없이 수정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 대표는 “그림의 균형과 색상, 구도, 배치까지 완벽히 맞췄는데도 끊임없이 수정을 요구하는 과학자들이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라며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 과학 연구가 실험과 수정을 무한 반복하며 조금씩 발전해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과학자들의 습관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2013년 현택환 서울대 교수팀이 발표한 ‘사이언스’ 논문의 3D 영상을 만들 때 오명환 선임연구원(제1저자)과 3박 4일간 합숙하기도 했다. 그는 “함께 작업하며 정을 쌓고 친해진 과학자도 많다”라고 말했다.

간혹 과학자와 의견 충돌이 있을 때도 있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최대한 정확하게 표현해 달라고 요청할 때다. 요구를 따르다 보면 그림이 재미없어질 게 뻔히 보이므로 이럴 때는 ‘타협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 대표는 “연구의 의의를 살리면서도 표지로 실릴 만큼 재미를 유지하는 게 가장 어렵다”고 밝혔다.

논문이 투고될 학술지의 성격을 미리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윤관현 대표는 표지그림 의뢰를 받으면 먼저 그림이 실릴 학술지의 특징부터 살핀다. 저마다 선호하는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연구의 정확성을 우선시하는 곳, 신비한 그림을 좋아하는 곳, 창의적이고 재치 있는 그림을 좋아하는 곳 등 다양하다. 김현주 작가는 “유명 학술지일수록 그림 한 장만 봐도 연구 성과를 대략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가 담긴 표지를 선호한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전문 작가이다 보니 표지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철학을 담는 것도 중요하다. 이 대표는 연구를 완전히 다 설명하는 그림보다는 내용이 뭔지 궁금하게 만드는 표지가 좋은 표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독자가 표지에서 호기심을 느끼면 논문을 볼 확률이 높아진다”라며 “학술지 편집자들도 그런 표지를 선호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학술지 표지 선정 어떻게 하나▼

연구성과 뛰어난 논문 후보 2∼5편 고른뒤 그림따라 앞-뒷면 결정





명망 있는 국제학술지에 표지논문으로 실리면 다양한 이점이 있다. 연구자 스스로에게 큰 영광일뿐더러 학계에서 소위 ‘이름값’을 높이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림이 예쁘다고 무조건 표지로 선정되는 건 아니다. 세계 유력 학술지 편집자들은 표지논문 선정 기준으로 ‘선(先) 연구 성과, 후(後) 그림’의 원칙을 고수한다. 편집자들이 한 호에 실릴 논문 수십 편 중 연구 내용이 우수하고 영향력이 큰 ‘표지 후보’ 논문을 몇 편 선정한 다음 연구자에게 추후로 그림을 요청하는 식이다.

학술지 ‘랜싯(Lancet)’ 자매지 ‘랜싯 당뇨병 및 내분비학(Lancet Diabetes & Endocrinology)’의 베닛 네일 편집자는 본지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표지 후보에 오르는 논문은 그때마다 다르지만 보통 2∼5편 내외”라며 “주제나 그림이 모두 훌륭한 경우 처음부터 하나만 선정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후보군이 정해지면 최종적으로 그림 평가를 거쳐 1등이 된 논문은 전면 겉표지에, 2등은 후면 겉표지에 실리고, 3등부터는 내지에 싣는다. 한마디로 연구 성과와 그림, 둘 다 최고 수준이어야 표지에 실릴 수 있다.

연구 내용이나 표지그림 이외에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기도 한다. 조지프 카푸토 과학저널 ‘셀(Cell)’ 편집자는 “그림의 미적 아름다움, 창의성, 전문성을 판단해 투표로 표지를 선정하고 있다”며 “다만 경쟁 학술지에 비슷한 그림이 실렸다면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과학자들은 표지를 목표로 화려한 그래픽 제작을 의뢰한다.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저널 ‘사이언스’의 7월 8일자에 표지논문을 게재한 박성진 미국 하버드대 바이오엔지니어학과 연구원은 “같은 논문이라도 표지에 실리면 더 많이 읽히므로 내 연구를 학계에 널리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며 “앞으로 연구비를 수주받는 데도 간접적인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상영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는 “최근 수년 새 학술지 겉표지에만 4편 이상 논문을 실었다”면서 “내 연구가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걸 어필할 수 있어서 주위에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너무 표지를 의식하는 건 좋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박 연구원은 “표지에 실리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것도 좋지 않다”며 “표지 선정은 좋은 연구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결과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변지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he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