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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활의 시장과 자유]“한국은 시장경제 할 수 있는가”

입력 | 2016-07-27 03:00:00


권순활 논설위원

2004년 4월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탄핵 역풍에 힘입어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86 운동권 출신의 ‘탄돌이’들이 대거 금배지를 달았다. 노무현 정권 청와대와 여당의 젊은 실세들은 총선 민의를 거론하며 경제정책에서도 좌향좌 드라이브를 걸었다.

완장을 찬 그들에게 17대 총선 두 달 전 취임한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눈엣가시였다. 당시 이헌재는 성장을 통한 고용 창출과 기업가 정신 고양을 강조했다. 개혁과 성장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성장이 더 중요하다는 말도 했다.

12년 전 이헌재의 탄식

이헌재는 그해 7월 14일 “한국 경제가 한계에 부닥친 이유는 주력세대인 386세대가 경제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정치하는 법만 배운 때문”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평소 선문답에 가까운 간접화법을 구사하던 그로서는 이례적으로 강한 톤이었다. 이날 발언 이후 정권 일각에서 그를 조기 낙마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닷새 뒤인 7월 19일 밤 이헌재는 자택 앞에서 1시간 반 동안 ‘뻗치기’를 하며 기다리던 동아일보 신치영 기자(현 채널A 경제부장)와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만나 두 시간 넘게 심경을 털어놓았다. 그는 “상황이 어려워도 시장경제가 자리를 잡아야 나라가 살 수 있다”며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주식 백지신탁제도, 부유층에 대한 사회적 반감의 후유증을 우려했다. “요즘은 한국이 진짜 시장경제를 할 수 있을지에 의문이 들기도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본보 1면 머리기사로 보도된 이헌재의 심야 인터뷰는 큰 파장과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운동권 경제관의 위험성을 부각시켰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올해 4·13총선에서 승리한 뒤 출범한 20대 국회의 발의 법안들을 보면서 12년 전을 떠올린다. 당시 여당이 지금은 야당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이헌재가 걱정한 반(反)시장-반기업 바람은 그때보다 훨씬 거칠게 불고 있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의원입법에는 과잉·졸속 법안이 수두룩하다. 몇 가지 예만 들더라도 민간 기업 청년고용할당제, 기업 임직원 최고임금 제한, 퇴근 후 업무지시 일절 금지 등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황당한 법안이다. 지나치게 불합리한 격차는 줄여 나가야 하지만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자유와 창의라는 시장경제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하고 ‘기업 하려는 의지’를 꺾는 과잉 입법은 소탐대실(小貪大失)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경제의 양면을 함께 보는 ‘복안(複眼)의 관점’을 중시하지만 반시장 법안들이 대거 통과되면 국민과 국가에 치명적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점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확신한다. 대기업들이 때로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해외 투기자본의 한국 기업 경영권 공격을 부추기는 법안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거야(巨野)가 이런 무리한 법안들에 굳이 미련이 있다면 내년 대선에서 정권을 다시 잡은 뒤 통과시켜 결과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지면 어떨까.

지옥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된다

전광우 연세대 석좌교수는 한 신문 칼럼에서 “지금은 불만 불안 분노에 편승한 인기영합적 정책으로의 급선회를 경계할 시점”이라고 썼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된다’는 말도 있지만 저성장의 그늘에 지친 국민의 좌절감을 이용해 더 큰 고통과 실패를 부를 급진 좌파이념이 기승을 부리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기대보다 우려가 앞서는 20대 국회의 초반 행태를 지켜보면서 “한국이 시장경제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던 2004년 이헌재의 탄식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