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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기자의 달콤쌉싸래한 정치]대통령의 탈당

입력 | 2016-07-11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이재명 기자

영화 ‘사도’에서 영조는 “세자가 성인이 되었으니 보위를 물려줄 때가 됐다”며 선위(禪位·임금의 자리를 물려줌)를 선언한다. 눈치를 살피던 신하들은 극구 만류한다. 이 소식을 들은 사도세자도 선위를 거둬달라며 머리를 조아린다. 결국 영조는 대리청정(세자나 세제가 왕 대신 정사를 돌보는 일)을 택한다. 이때 영화 속 영조는 ‘씩 웃는다’.

홀가분해서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영화엔 나오지 않지만 영조는 대리청정 전까지 5차례나 선위 파동을 일으켰다. 조선 왕들 가운데 유일한 천민의 핏줄이자 노론이 만든 왕이란 세간의 ‘뒷담화’에 시달리던 영조는 끊임없이 선위 파동으로 신하들의 로열티를 점검한 셈이다.

조선엔 이런 왕이 수두룩했다. 나라가 끝장나기 직전이던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는 무능한 선조 대신 전장에서 맹활약한 광해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게 순리라고 여겼다. 이를 눈치 챈 선조가 왕위를 지키기 위해 꺼낸 카드는 역설적으로 선위 파동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선위는 금기어였다. 현재권력인 왕과 미래권력인 세자 사이에서 자칫 세자 편에 섰다간 세자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된다. 세자와 신하들이 “통촉해 달라”며 왕의 선위 선언을 극구 거둬들이게 만든 이유다.

평시에도 선위 파동이 일어나면 모든 정사(政事)가 중단됐다. 선조는 전시 상황에서도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자 15차례나 선위 파동을 일으켰다. 이때마다 전장을 누비던 광해군은 조정으로 달려와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선위 파동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대통령의 탈당이다. 역대 정부에선 미래권력의 카드였다. 인기가 바닥난 현직 대통령과의 차별화 수단이었다. 여권은 정부 실패의 책임을 오롯이 현직 대통령에게 지운 뒤 다시 표를 구걸했다.

박근혜 정부에선 그 양상이 독특하다. 현재 권력이 먼저 탈당 카드를 꺼내 으름장을 놓는다. 조선시대 선위 파동과 빼닮았다. 박 대통령이 직접 탈당을 입 밖에 낸 적은 없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친위대는 끊임없이 탈당을 입에 올린다. 새누리당 혁신비상대책위원회가 유승민 의원의 복당을 전격 결정하자 친박(친박근혜)계는 “비대위 쿠데타다. 대통령이 탈당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놨다.

1년 전에도 그랬다. 박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유 의원(당시 원내대표)에게 ‘배신의 정치’란 주홍글씨를 새겼다. 그럼에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새누리당 의원들이 의원총회에서 유 의원의 재신임을 결정하자 친박계는 곧바로 대통령의 탈당으로 위협했다. 당시 여권 핵심 인사는 김무성 대표에게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탈당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며 ‘선위 교서’를 전달했다고 한다. 결국 김 대표는 “원내대표가 대통령을 이길 순 없지 않느냐”며 유 의원에게 원내대표직 사퇴를 요청했다.

친박계가 다음 달 9일 당 대표 경선을 앞두고 ‘서청원 등판론’을 주장하는 대목에서도 선위 파동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비박(비박근혜)계가 당권을 잡으면 박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할 테고, 이는 곧 분당(分黨)이라는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큰형님’ 서 의원이 당권을 쥐어야 한다는 논리다.

친박계는 박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을 ‘탈당 위협’의 지렛대로 활용한다. 박 대통령의 지원 없이는 누구도 대권 꿈을 꿀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핵심 지지 기반인 TK(대구경북)의 균열은 심상치 않아 보인다. TK의 한 인사는 현지 민심을 이렇게 전했다. “공항을 달라고 했더니 미사일(경북 칠곡은 사드 배치의 최적지 중 하나로 꼽힌다)을 주겠단다. 민심이 좋을 리 있나.”

박 대통령의 탈당 요구는 내년 대선 정국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 설령 친박계가 미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후보가 된다 해도 현 정부와의 정책 차별화는 불가피하다. 김무성 전 대표, 유승민 의원이 대선 후보가 된다면 야당보다 매섭게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며 경제정책의 전면 재조정을 요구할 것이다. 성난 민심을 감안할 때 이는 정권 재창출의 필수조건이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의 탈당을 막고 여권이 공멸을 피할 방법은 하나다. 새로 선출될 지도부가 미리 정책 좌표를 중도로 옮겨 현재권력과 미래권력 간 충돌의 완충 역할을 해줘야 한다. 또 대선 정국에서 계파 간, 당청 간 극한 대립을 피하려면 사전에 계파 강경파들을 내쳐 갈등 유발지수를 낮춰야 한다. 친박계 강경파들이 ‘현대판 선위 파동’을 앞세워 옹립한 ‘큰형님’으로는 일시적으로 의원들의 입을 틀어막을지 모르지만 대통령의 탈당 요구만 재촉할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