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참사’ 막을 수 있었다]<上> 어이없이 놓친 골든타임
《 정부도, 기업도 막을 수 있었다. 동아일보가 사건을 추적해 온 전문가들과 함께 가습기 살균제가 등장한 1994년부터 수거 명령이 내려진 2011년까지 정부와 화학기업이 남긴 관련 문건들을 분석한 결과 수백 명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이 적어도 6차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가습기 살균제의 비극, 과연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나. 20대 국회의 첫 국정조사가 7일 시작된다. 》
○ SK케미칼 ‘죽음부른 독성물질’ 10년간 납품… 비극의 시작
① ‘살인 물질’ 10년간 납품한 SK케미칼
최악의 피해를 낸 가습기 살균제는 옥시레킷벤키저의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이다. 정부의 1, 2차 피해조사에서 사망자가 102명으로 집계됐다. 옥시가 2001년 제품의 주성분을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으로 변경하면서 흡입 독성 시험을 생략한 게 사건 ‘원흉’으로 꼽힌다. PHMG를 사용한 제조사 3곳은 이번에 검찰 수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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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첫 단추 잘못 끼운 고용노동부
고용노동부(당시 노동부)는 1996년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SK케미칼(당시 유공)로부터 PHMG의 호흡기 과민성, 급성 독성 등을 조사한 ‘유해성·위험성 보고서’를 제출받았어야 한다. 하지만 고용부는 5일 “SK케미칼이 이 보고서를 제출했다는 기록이 현재 남아 있지 않다”며 “애초에 받지 않은 것 같다”고 밝혔다. 당시 고용부가 PHMG의 흡입 독성 자료 제출을 강력히 요구했다면 옥시 등에 사용된 PHMG를 처음에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고용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크게 불거진 2011년 10월에야 PHMG의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처음으로 작성했다.
③ ‘에어로졸’인데 흡입 독성 평가 안 한 환경부
환경부는 2003년 한 업체가 고무·목재 보존제로 쓰겠다며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에 대한 유해성 심사를 신청했을 때 피부와 경구 독성만 평가한 뒤 ‘유독물이 아니다’라고 고시했다. 주요 용도로 ‘스프레이, 에어로졸 제품 등에 첨가’가 명시돼 있었지만 흡입 독성은 시험하지 않았다. 6년 후 중소업체 버터플라이이펙트는 별다른 제약 없이 PGH를 원료로 ‘세퓨’를 출시했다. 세퓨는 다섯 번째로 많은 사망자(14명)를 낸 가습기 살균제다. 한 전문가는 “환경부나 국립환경과학원이 흡입 독성 자료를 요구했다면 그 14명은 지금도 숨쉬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④ ‘자율안전확인’ 마크 달아준 산업통상자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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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현장 조사하고도 원인 못 밝힌 질병관리본부
질병관리본부는 2006년부터 의학계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 간질성 폐렴이 보고되자 2008년 4월 서울아산병원에서 환자 9명의 사례를 검사했다. 하지만 이때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2011년 8월 2차 조사에서 가습기 살균제가 폐질환의 원인물질로 추정된다고 결론 냈다. 2009∼2011년 3년간 발생한 환자는 2006∼2008년의 7배가 넘는다. 질병관리본부가 초기에 정밀한 역학조사 결과를 내놨다면 대규모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질병관리본부는 옥시 다음으로 많은 사망자(27명)를 낸 ‘가습기메이트’의 주성분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과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에 대해 제대로 된 추가 연구를 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받는다. 당시 질병관리본부는 안전성평가연구원에 PHMG, PGH뿐 아니라 CMIT, MIT의 흡입 독성 동물실험을 의뢰했다. 당시 연구진은 촉박한 실험 기간 탓에 CMIT, MIT에 대해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하지만 질병관리본부는 이 같은 결과를 받아 들고 PHMG, PGH를 원료로 한 제품 6개만 수거하도록 한 뒤 CMIT, MIT에 대해선 추가 연구를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이는 현재까지 가습기메이트를 제조한 SK케미칼 등의 방어 논리로 활용되고 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