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의 작품들. 왼쪽 사진은 하드보드지에 유채물감으로 그린 ‘나무와 여인’(1956년). 오른 쪽은위부터 ‘빨래터’(1950년)와 ‘우물가’(1953년). 모두 캔버스에 유채. 박수근은 아내를 처음 만난 장소인 빨래터 등 마을공동체의 소박한 생활공간 모습을 화폭에 즐겨 담았다. 박수근미술관 제공
박수근이 즐겨 그린 소재는 평범한 이웃이다. 아낙네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아낙네는 도시 변두리나 시골에서 살고 있으며 생활을 담보하고 있다. 그들은 시장을 오가면서 삶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비록 행상이라 해도 흥청거리면서 거래를 하거나 놀고 있는 모습이 없다.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는 모습, 바로 인고(忍苦)의 모성(母性)이다. 박수근 그림에는 정겨운 가족도가 없다. 특히 노동력이 있는 청장년층의 남자가 없다. 가장(家長) 부재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물론 ‘청소부’와 같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물들은 대부분 실내에 있지 않고 노상이나 들판과 같은 실외에 있다. 그렇다고 역동적인 현장에서 뭔가 도모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들판에서 바람을 이겨내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강한 이웃들이다.
박수근은 나무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의 나무는 썰렁한 겨울나무이다. 그것도 필요 이상으로 가지가 잘려나가고 줄기조차 굽어 있다. 정상 발육과 거리가 있다. 박수근 나무는 ‘몸부림’ 그 자체이다. 게다가 이파리 하나 허용하지 않는 나목(裸木)이 박수근표 나무이다. 나목은 갈등과 궁핍의 시대를 상징한다. 박수근 그림의 대표적 도상은 나목과 아낙네를 함께 그린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우리네의 고향 풍경이고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래서 한국적 정서를 집약시킨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고향회귀 정신이 존재하는 한 박수근 그림은 하나의 표상처럼 사랑받게 될 것이다. 박수근 그림은 우리 고향의 초상(肖像)이기 때문이다.
윤범모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