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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제충만]가난하다고 아이와 놀 줄 모를까

입력 | 2016-06-02 03:00:00


제충만 세이브더칠드런 국내옹호팀장

“저는 엄마, 아빠랑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또 그럼 안 될 거 같기도 해요. 매일 일해도 돈이 없어서 힘들어하는데 나랑 시간 보낸다고 일을 줄이면 못 살 거 같아요. 학원도 가야 하고, 용돈도 써야 하니까. 돈이 줄지 않고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날 수는 없는 건가요?”

아동 참여 활동을 통해 만난 여중생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학생의 아버지는 서울에 따로 살면서 일을 하고, 어머니는 마트에서 일한다고 했다.

대한민국 부모들은 너무 바쁘다. 주 3일 이상 야근을 하는 사람이 43%나 된다는 매킨지 연구 보고서가 올 3월에 나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서는 연간 노동시간이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길었고, 평균보다는 무려 354시간이나 더 길었다. 지난해 12월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0시간이 넘었고, 통근시간도 1시간 23분에 달했다.

군대에서 내 상관인 작전과장은 초등학생 자녀를 둔 아빠였다. 책상에는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고, 휴대전화 바탕화면에도 아이는 아빠에게 안겨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의 퇴근을 하지 못했다. 야근이 주식이었고, 주말 근무가 부식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이가 보고 싶지 않은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녀석 학원 보내고 나중에 대학 보내려면 지금 열심히 해야지”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부모들은 자녀와 보내는 시간이 너무 적다. 지난해 발표된 OECD 삶의 질 보고서에서 대한민국 아빠들이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루에 단 6분이고, 이 중 자녀와 함께 노는 시간은 3분에도 못 미쳤다. 엄마 시간을 합쳐도 총 48분에 불과했다. 호주 아빠는 혼자서 하루에 72분을 자녀와 함께 보낸다고 하고, OECD 평균 부모 시간은 총 150분이라고 한다.

일을 해도 먹고살기 힘든 근로 빈곤층 가정의 부모 부재는 더 심각하다. 이들 부모는 월급이 워낙 적다 보니 비싼 집값, 높은 물가, 사교육비 부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동시간을 더 늘리거나 ‘투잡’을 해야 하는 현실에 내몰린다. 2013년 한국고용정보원의 연구에서도 근로빈곤층의 경우 시간 빈곤도 함께 겪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즉, 생존을 위해 가족과의 화목한 시간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문제는 길어진 부모의 부재시간에 아이는 학원에 가거나 누군가가 봐줘야 하는데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아이 혼자 방치되는 방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억울하다.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데 왜 일하면 일할수록 아이에게 미안해지는 걸까?

피곤한 부모들에게 미국 인권운동가인 제시 잭슨은 “자녀에게는 선물보다 당신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녀와 눈을 마주치고, 의미 없어 보이는 놀이에 파트너가 되어주고, 책을 읽어주거나 대화를 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만으로도 자녀의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내가 일하는 단체의 창립자 에글런타인 젭은 “세상은 비정하지 않다. 다만 상상력이 모자라고 매우 바쁠 뿐이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부모들이 비정해서 아이와 시간을 적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다만, 돈이 부족하고 매우 바쁠 뿐이다. 진짜 비정한 것은 사람 뽑을 생각은 안 하고 적은 임금으로 밤낮 가리지 않고 이윤을 챙기려 하는 기업들이다. 또 아이들의 행복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도 상상력이 모자란다. 가난하고 피곤한 그저 열심히 살아온 엄마 아빠들의 마음은 잘 알고 있다고, 미안해하지 말라고 전하고 싶다.

제충만 세이브더칠드런 국내옹호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