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
‘에누리’는 원래 ‘물건을 팔 때 받을 값보다 더 많이 부르는 것’을 뜻했다. 일종의 ‘바가지’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반대인 ‘값을 깎는 일’로 쓴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우리 사전은 두 가지를 모두 표제어로 올려놓고 있다.
그런 에누리마저 요즘은 한자말 ‘할인(割引)’과 외래어 ‘세일’ ‘디스카운트’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더욱이 순우리말 에누리를 일본말로 알고 있는 사람까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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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소금 맛’과 ‘고소하다’도 이중적 표현이다. 깨소금은 볶은 참깨를 빻은 데다 소금을 넣은 것으로,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그런데 입길에 오르내리는 ‘깨소금 맛’은 그게 아니다. 남의 불행을 은밀히 즐긴다는 뜻으로 변해버렸다. ‘고소하다’도 마찬가지. 언중은 볶은 깨나 참기름 따위에서 나는 맛이나 냄새라는 뜻 외에 ‘미운 사람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속이 시원하고 재미있다’는 뜻으로도 쓴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충분히 예상되는 감정이지만, 없어져도 좋을 낱말이다.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을 뜻하는 ‘이판사판’도 마찬가지.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은 불교에서 왔다. ‘이판’은 속세를 떠나 수도에만 전념하는 일을, ‘사판’은 절의 재물과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일을 일컫는다. 이판 일을 하는 스님이 이판승, 사판 일을 하는 스님은 사판승이었다. 한데 언중은 이 둘을 합친 이판사판을 전혀 다른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이다.
단어의 의미와 용법은 언중이 규정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뜻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단어와 접하면 그렇게 만든 언중마저 놀란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