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담뱃갑 경고그림은 시각적 폭력” “혐오감 줘야 흡연욕구 줄어”

입력 | 2016-04-19 03:00:00

“끔찍한 환자 사진까지 넣어야 하나” 논란 확산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31일 공개한 담뱃갑 경고 그림 시안. 왼쪽은 10종의 시안 중 담배 판매인과 흡연단체 측이 ‘혐오감이 심하다’고 지적한 그림이고, 오른쪽은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복지부는 6월 23일까지 어떤 경고 그림을 얼마나 사용할지 등을 확정할 예정이다. 보건복지부 제공

10여 년간 담배를 피운 직장인 한동훈 씨(32)는 최근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담뱃갑 경고 그림을 본 뒤 인터넷으로 담배 케이스를 주문했다. 경고 그림이 지나치게 혐오스러워 그냥 들고 다니기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다. 담배를 꺼내면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씨는 “흡연을 즐길 권리도 있는데 정부가 담뱃세를 과도하게 인상한 데 이어 혐오스러운 그림까지 넣으려는 건 흡연자를 지나치게 억압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달 31일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담뱃갑 경고 그림 시안(試案) 10종을 두고 담배업계와 흡연 단체들이 “지나치게 혐오스럽다”며 반발하고 있다. 복지부와 금연 단체는 흡연 욕구를 낮추기 위해선 불가피할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 비해 혐오 강도도 낮다고 반박한다.

경고 그림은 세계보건기구(WHO)가 권고하는 대표적인 비(非)가격 금연 정책이다. 한국은 지난해 6월 도입을 확정했다. 복지부가 이번에 발표한 경고 그림 후보에는 △암 덩어리가 부풀어 있는 후두암 환자의 입 △구멍이 난 환자의 목 △절개 수술을 받은 환자의 가슴 등이 포함됐다. 복지부는 경고 그림의 면적을 담뱃갑 앞뒤 총면적의 30% 이상이 되게 하고 상단에 위치시켜 눈에 잘 띄게 한다는 계획이다. 6월 23일까지 경고 그림과 문구 선정이 끝나면 12월 23일부터 담뱃갑에 경고 그림이 들어가게 된다.

○ 혐오성 논란

최비오 한국담배소비자협회 정책부장은 “담뱃세 인상 이후 약 1100만 명의 흡연자들이 10조 원에 이르는 세금을 냈는데도 정부는 흡연자의 권리를 무시하고 혐오스러운 그림까지 넣으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미 금연 구역 확대 등으로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는 흡연자들이 이번에는 ‘혐오 대상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흡연자들은 경고 그림의 혐오성 강도가 ‘지나치게 혐오감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국민건강증진법 단서 조항에도 벗어난다고 지적했다. 담배를 피울 때마다 흉측한 그림을 보게 하는 것은 흡연자들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이유에서 만든 조항이다. 한 흡연 단체 관계자는 “TV 광고라면 모자이크 처리될 것이 뻔한 그림들이 무차별적으로 흡연자와 비흡연자에게 노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복지부와 금연 단체는 “흡연자에게 충격을 줄 수 없는 경고 그림은 무용지물”이라고 반박한다. 또 혐오감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1890명을 온라인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이번에 제작한 시안 10종은 해외의 경고 그림보다 혐오감이 덜하다고 반박한다.

문창진 차의과학대 대학원장(경고 그림 제정위원회 위원장)은 “선정한 시안은 흡연자에게 충격을 줘 금연 효과는 감소시키면서도 혐오감은 해외에 비해 강하지 않은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금연자들은 혐오스러운 경고 그림 부착에 찬성하는 분위기다. 금연 직장인 박슬기 씨(29)는 “경고 그림을 본 뒤 애연가인 아버지에게 금연을 간곡히 요청하고 있다”며 “아버지 또한 가족에게 이런 그림을 노출시키며 충격을 줄 바엔 차라리 끊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그림 위치 논란

경고 그림을 담뱃갑 상단에 넣으면 흡연자뿐 아니라 판매인과 비흡연자도 정신적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담배 진열대는 주로 계산대 근처에 있고 담배 상단은 가려지지 않아 근무 중인 판매인의 시야에 노출된다. 다른 물품을 사러 온 손님도 마찬가지다. 윤용식 한국담배판매인회 중앙회 홍보실장은 “흡연자의 흡연 욕구를 줄이겠다는 목적이면 구매 이후 흡연자들이 볼 수밖에 없는 담뱃갑 하단도 상관없다”며 “점포엔 다른 식품도 많은데 굳이 다른 손님들에게까지 이를 노출시켜 혐오감을 줄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경고 그림 선정에 참여한 한 전문가는 “애초에 ‘구매 욕구’ 자체를 차단하기 위해 경고 그림을 상단에 노출시킨 것”이라며 “일반 소비자의 거부감이 커진다면 앞으로 담배 진열대를 소비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흡연 예방 효과 논란

경고 그림의 흡연 예방 효과를 두고도 논박이 이어진다. 백혜진 한양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한국헬스커뮤니케이션학회장)는 “WHO 가입 국가 중 우리보다 먼저 경고 그림을 도입한 나라에서 흡연율이 떨어졌다는 통계가 있다. 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지만 둘 사이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KT&G 관계자는 “말레이시아와 파키스탄에서는 경고 그림을 도입하자 오히려 흡연율이 약 3%포인트 증가했다”며 “WHO 가입국의 흡연율은 이미 떨어지는 추세였고, 경고 그림 도입으로 흡연 욕구가 감소했다는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입증하긴 힘들다”고 반박했다. 정부가 금연 정책을 강하게 쓰는 캐나다 등의 사례만 참고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상훈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그동안 국내에 출시된 담뱃갑이 지나치게 미화된 측면이 있어 이를 규제한다는 점에선 경고 그림이 효과적일 수 있다”며 “다만 너무 자극적인 그림으로 충격을 주는 방식을 쓴다면 소비자들이 금방 익숙해져 효과가 단기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