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숨죽이던 증오심에 불지른 트럼프
“9·11테러를 보세요. 이슬람 국가에서 여자들은 얼마나 끔찍한 대우를 받나요. 당신(루비오)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겠지만 난 아니에요.”(도널드 트럼프)
10일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공화당 대선 후보 12번째 TV토론에서도 트럼프는 자신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을 거부하는 후보’임을 강조했다. 정치적 올바름은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적인 언어와 소수자나 약자에게 불쾌감을 주는 표현을 바로잡으려는 사회 운동을 뜻하는 말로 1980년대 미국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보수주의자의 핸드북’이란 책을 쓴 라디오 진행자 필 밸런타인은 “‘소수자에 대한 관용’이란 이유로 그 어떤 다른 목소리도 관용하지 않는 PC야말로 진보 세력의 파시즘”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폭력을 휘두르고 도망가는 흑인을 쫓아가면서 ‘검둥이(Nigger)! 거기 안 서!’라고 말하면 그 흑인의 폭력보다 PC에 위배되는 ‘검둥이’라는 단어가 더 큰 사회적 문제가 된다. 이게 정상이냐”고 했다.
영국 가디언도 “트럼프 지지자 상당수는 PC의 사회적 강요에 질린 사람들”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한 60대 여성은 “종교색이 드러날까 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못 하고, 상대가 성적 소수자일 수 있으니 ‘그’나 ‘그녀’란 호칭을 쓰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며 “나 때문에 누가 상처받을까 걱정하는데 내가 상처받는 걸 걱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정치적 올바름’이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데 따른 부작용도 심각하다. 13일 트럼프의 시카고 유세장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는 ‘PC가 사라져 가는 미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 줬다고 미 언론은 분석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들이 그에 반대하는 흑인들을 물리적으로 밀치면서 ‘다음에 또 방해하러 오면 죽여 버리겠다’는 극단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PC 때문에 그동안 말도 제대로 못 하던 보수층 미국인들의 속은 시원해졌지만 트럼프 같은 극단적인 인물이 또 다른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