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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공무원들의 영혼을 빼앗지 말라

입력 | 2016-03-07 11:05:00


심규선 대기자

청와대는 공무원들의 영혼을 빼앗지 말라

청와대 참모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동아일보 1일자 8면에 보도된 “외교부 비자담당자들 줄줄이 ‘항명좌천’ 위기”라는 기사를 읽고나서 떠오른 생각이다. 갑질을 하지 않아도 무서운 청와대의 갑질은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동아일보와 채널A의 보도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다. 법무부는 지난해 말로 종료예정이던 중국 등 5개국 단체관광객에 대한 비자발급 수수료(1인당 15달러) 면제를 1년간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5월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한데다 ‘2016년 한국방문의 해’를 맞아 관광객을 더 많이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회의에서 결정됐다.

문제는 이 수수료가 재외공관에서 비자발급업무를 담당해온 현지채용 직원들의 인건비로 쓰여 왔다는 점. 수수료 면제를 연장할 경우 수입이 줄어들어 현지 채용직원 120명(중국 93명, 동남아 27명)을 해고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에 외교부가 법무부와 문화부에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자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이 ‘항명성 공직기강 위반’으로 간주하고 외교부 재외동포영사국 국장과 심의관, 담당과장을 2, 3일간 조사한 뒤 좌천시키라고 외교부에 지시했다는 것이다.

우선 관계부처 사이에 공문을 주고받은 것을 항명으로 보는 편협함이 거슬린다. 제대로 일을 하려면 수수료 면제를 연장하기 전에 부작용까지를 검토하는 게 순리다. 뒤늦게나마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을 항명으로 보는 것은 당치 않다. 결정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었다는데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채널A 보도에 따르면 청와대 관계자는 “부처간 협의가 끝난 상황에서 항의성 글을 보내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라며 “징계 없이 문책성 전보로 끝낸 건 상당히 봐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회의에서 결정한 일에 토를 다는 걸 괘씸하게 여긴 듯하다. 부처간 협의가 끝나도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 청와대가 이런 일에 발끈한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정부는 외교부의 문제 제기 이후, 별도 예산을 확보해 계약직 비자심사 인력의 고용을 연장하기로 했다. 결국 외교부의 문제 제기가 옳았음을 인정한 것 아닌가. 그런 마당에 “상당히 봐준 것”이라는 말은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는 것 같아 납득할 수 없다. ‘항명’이라 함은 정당한 명령에 불복하는 것인데, 문제가 있는 결정에 대안을 요구했다면 의견제시인 것이고, 그 의견이 옳았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 장관 등 수뇌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좌천성 인사 지시는 거두라고 청와대에 건의하는 게 옳다. 구성원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데도 침묵하는 것은 비겁하다.

한때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정권의 입맛에 맞춰 소신을 버리고 복지부동하는 공무원을 비하하는 말이다. 본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도 문제인데, 청와대라는 권부 중의 권부가 공무원의 언로를 막고 영혼을 빼앗아 복지부동하도록 만드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이번 사안은 항명의 의도가 없는 한, 아무리 나쁘게 봐도 ‘오해’에 불과하다. 모르긴 몰라도 조사를 받은 공무원들도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고, 그 이상의 뭐가 확인됐을 리도 없다. 그저 청와대가 항명이라고 생각했다는 자체가 문제의 본질 아니겠는가.

사실 이 글을 쓰기 전에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어 좀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참았다. 당사자들이 진짜로 항명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고, 사실관계를 더 확인하지 않아도 청와대의 조치는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보통은 인사 조치를 받아들이고, 조용해지고 나서 다시 생각하자고 당사자들을 설득하는 게 공직사회의 오랜 관행이다. 이번에는 그러지 말았으면 한다. 백보를 양보해 구성원들이 바뀌지 않는 가족간이나 회사라면 또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인사권자들이 바뀌고, 가능하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공직사회에서 지금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은 정의에 반한다.

기자는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세계지리 8번 문항의 정답을 둘러싼 소송에서 평가원과 교육부가 서울고등법원의 ‘정답 없음’ 판결을 수용하고 상고를 포기한 것을 높이 평가한 적이 있다. ‘어차피’ 대법원까지 가는 관행을 버리고 ‘그래도’ 지금 바로잡는 게 낫다고 판단한 공직사회의 용기를 지지한 것이다.

언론이 여론을 모두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청와대의 이번 조치에 대해 일부 언론은 부당하다고 지적하고 있고, 일부는 무관심하다. 따라서 좌천성 인사 지시를 철회한다고 해서 문제될 게 없다. 그런데도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청와대의 체면만을 생각한 아주 옹졸한 처사로 기록될 것이다.

대통령은 요즘 부당한 일들이 즉각 바로잡히지 않는 데 대해 울분을 토로할 때가 많다. 그런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보아온 참모들만이라도, 자신들이 고칠 수 있는 것은 즉각 고치는 게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하는 일이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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