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리스본행 야간열차(파스칼 메르시어·들녘·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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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수많은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산다. 어떤 씨앗은 햇빛과 물을 만나 싹을 틔우지만 대부분의 씨앗은 깊숙한 곳에 묻혀 그저 가능성으로만 남는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 가능성의 씨앗을 하나 둘 묻어가는 일인지 모른다. 어린시절 지도에서 처음 보는 도시의 이름을 외우며 오지여행을 꿈꿨던 내가 낯선 곳에서 자는 걸 끔찍하게 여기는 어른이 된 것처럼.
이 책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스위스 베른에서 틀에 박힌 일상을 살던 사람이다. 그는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집과 학교를 오가며 고전어를 가르친다. 걸어 다니는 고전(古典) 같은 그를 사람들은 ‘파피루스’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그는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한 포르투갈 의사의 생애를 뒤쫓으며 그는 잊고 있던 자신과 만난다. 모래바람이 부는 이스파한(이란)을 갈망했던,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예전의 나’를.
삶의 무게가 너무 버겁게 느껴진다면 잠시 ‘지금의 나’에게서 도망쳐보는 건 어떨까. 그레고리우스처럼 거창한 여행이 아니라도 좋다. 그저 평소에 해본 적 없는 소소한 일탈도 메마른 삶에 촉촉함을 더해줄 수 있다. ‘나답지 않은 행동에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두자. 오래 전부터 당신 안에서 기다려온 작은 씨앗이 비로소 싹을 틔운 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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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애진기자 ja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