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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동안 좇은… 월북 아버지는 상처이자 문학의 동력

입력 | 2016-02-18 03:00:00

[요즘! 어떻게?]새 소설집 ‘비단길’ 낸 김원일 작가




김원일 씨는 구상을 완벽히 해놓고 쓰지는 않는다고 했다. 다섯 권에 이르는 ‘불의 제전’을 쓸 때도 인물 이름이 헷갈릴까 싶어 적은 메모 한 장만 벽에 붙여놨다고했다. ‘글은 펜 끝이 쓴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했는데, 실은 축적된 경험의 힘으로 쓰이는 게 아닐까 싶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김원일 씨(74)가 소설가의 길을 걸어온 지 50년째다. 그는 최근 새 소설집 ‘비단길’(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 장편 ‘아들의 아버지’를 낸 지 3년 만에 새 책을 묶은 것이다.

16일 서울 마포구 잔다리로 문학과지성사에서 그를 만났다. 작가는 막 인쇄소에서 가져온 책에 저자 서명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체중이 많이 줄었다가 호전됐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신장 투석을 해왔다. 2, 3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야 한다.

놀라운 대목은 새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 절반 이상이 지난해에 쓰였다는 것이다. 작가의 몸이 부쩍 쇠약해진 시기와 겹친다. 그는 “젊을 때 열심히 쓰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힘에 부쳐 못 쓸 수 있는데, 새 작품을 이렇게 낼 수 있다는 게 축복”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소설은 체험에 상상력을 보태어 쓴다지만 최근 들어선 상상력 대신 내가 겪었던 지난날을 떠올리기가 수월해졌다”고 했다.

어떤 연유로 그런 것인지 설명을 청했다. “이야기를 만들고 꾸미기보다는 하고 싶은 얘기를 진솔하게 들려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비단길’에 실린 작품들만 해도 대부분 내가 겪은 세월에서 얻은 소재다.”

김원일, 하면 ‘아버지’다. 널리 알려진 ‘마당 깊은 집’을 비롯해 ‘어둠의 혼’, ‘불의 제전’ 등을 통해 그는 6·25전쟁 때 월북한 아버지와 남겨진 가족의 이야기를 그렸다. 아버지의 부재(不在)는 작가 개인의 상처이자 한국 현대문학의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 ‘비단길’에서도 작가 평생의 주제였던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런데 작가의 소설에서 ‘비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를 말해왔던 것이, 이번엔 돌아온 아버지의 이야기다. 표제작에선 1950년 9월 북으로 떠나버린 아버지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화자의 집에 알려진다. 이때 작가가 조명하는 것은 월북한 아버지로 인해 고통받았던 어머니다. 북으로 남편을 떠나보낸 뒤 남편에게 잘못한 것만 자꾸 떠올리면서 한스러워했던 어머니의 애달픈 심정을 작가는 내보인다. 상처 많은 어머니에게 소설을 통해 ‘비단길’을 내어주지만 작가는 한편으로 아버지에 대한 문학적 집착을 놓지 않는다.

“원우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합디다(소설가 김원우 씨가 김원일 씨의 다섯 살 터울 동생이다). 나는 전쟁에 대해, 아버지에 대해서 여러 장면이 기억납니다. 그 기억들을 소설로 써왔어요. 50년 동안 아버지를 좇은 거죠.” 2000년대에 들어서야 그는 폐결핵으로 투병하던 북의 아버지가 1970년대 금강산 부근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여러 문학적 소재 중에서도 전쟁 체험이 가장 극적이라고 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상황 아닐까요. 가난, 이산, 이데올로기의 대립…. 내가 직접 겪은 경험과 겹쳐져 자연스럽게 문학적 형상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거창 양민학살사건을 소재로 삼은 ‘겨울 골짜기’, 일제강점기 민족 고난의 역사를 담은 ‘늘 푸른 소나무’ 등 취재에 공을 들인 작품도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지만, ‘마당 깊은 집’ 등 자전적 경험이 바탕이 된 작품은 그래서 쓰기가 수월했다고 작가는 털어놨다.

잘 알려졌듯 작가는 고교 때 화가를 꿈꾸었다가 가난 때문에 작가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금도 소설의 장면을 구상할 때면 컬러 화보로 떠오른다”며 웃었다. “집안이 어렵지만 않았어도 화가가 됐을 텐데…”라고 돌아보지만 그로 인해 한국문학은 김원일이라는 분단 문학의 대표 작가를 얻은 셈이다. “장편소설을 쓰다가 몸이 좋지 않아 쉬고 있다. 시골 마을을 무대로 전쟁을 겪은 아이들의 아픔을 그린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얘기도 아직 쓸 게 있는데….” 그의 창작열은 아직도 뜨거웠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