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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성희]빠삐용 소녀의 생지옥 탈출

입력 | 2015-12-23 03:00:00


12일 굶주림과 잦은 폭행을 견디다 못해 가스배관을 타고 2층 집을 탈출한 11세 소녀의 이야기는 영화 ‘빠삐용’을 다시 보는 듯하다. 티셔츠 반바지에 맨발 차림의 소녀는 뼈에 가죽으로 도배한 듯 말랐고 팔다리는 멍투성이였다. 동네 슈퍼마켓에서 먹을 것을 챙기던 소녀는 힘이 없어 과자 봉지조차 제대로 뜯지 못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바라보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친부와 동거녀, 동거녀의 친구는 음식을 배달시켜 먹으며 몇 끼를 굶은 소녀가 남긴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아무거나 먹는다”며 매질했다. 동거녀가 기르는 몰티즈 강아지가 소녀와 달리 포동포동했다고 하니 지독한 비인간성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친부도 어렸을 때 의붓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은 트라우마가 있고 직업 없이 ‘리니지’ 게임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처럼 끔찍한 학대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소녀가 경기 부천 소재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할 때 담임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소녀를 찾으려고 학대신고를 했지만 아동복지법상 교사는 신고의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경찰은 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다. 인천으로 이사한 이후 아버지는 아예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집 밖으로도 못 나가게 했다. 아이가 사라졌는데도 아무도 찾지 않았다. 지옥 같은 생활을 끝낸 건 소녀 자신이었다. 절해고도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소녀는 생지옥에서 빠져나왔다.

▷2013년 울산과 경북 칠곡의 의붓딸 폭행사망 사건을 계기로 아동학대에 관한 처벌이 강화됐지만 최고 형량이 징역 5년에 불과하다. 실제 아동학대 사례를 보더라도 단순한 학대 방임이라기보다는 살인이라고 봐야 할 경우도 많다. 소풍을 보내 달라는 의붓딸을 때려 사망케 한 울산 계모에게 살인죄(징역 15년)가 적용된 데 이어 최근 25개월 된 입양아 딸을 무차별 폭행하고 매운 고추를 먹여 사망케 한 40대 여성에게도 살인죄(징역 20년)가 적용됐다. 구속된 빠삐용 소녀의 친부를 포함한 보호자들에게도 어떤 법률을 적용해야 분이 풀릴지 모르겠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