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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러운 직장 박차고 꿈꾸던 길로… “응답하라, 행복!”

입력 | 2015-12-10 03:00:00

[2020 행복원정대/동아행복지수]<4>돈과 행복의 방정식
3인 남녀 ‘행복찾기 제2인생’
외국계기업 퇴사후 ‘헬스트레이너’ 택한 박한희씨




올해 8월 외국계 기업을 퇴사하고 헬스트레이너를 준비 중인 박한희 씨가 9일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그는 “일상에 안주했다면 절대 느끼지 못할 희열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행동하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진정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올해 8월 존슨앤존슨을 퇴사한 박한희 씨(27·여)의 조언이다. 그는 요즘 헬스트레이너를 준비하고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외국계 기업 정규직 자리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겠다며 바벨을 들었다.

박 씨는 특별한 꿈이 없었다고 했다. 남들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대학과 직장에 가면 된다고 믿었다. 부모님의 뜻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고려대 교육학과에 진학했지만 전공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즐거웠던 순간은 마케팅 동아리 생활이었다. 각종 공모전을 준비하며 열심히 활동했다. 그 경험을 살려 자연스럽게 마케팅 관련 직장을 구했다.

2013년 2월 존슨앤존슨 마케팅 부서에 입사했다. 외국계 회사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이었다. 3000여만 원의 연봉, 합리적인 의사소통 구조 모두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의문이 생겼다. ‘10년, 20년 뒤 내가 회사 간부가 됐을 때의 모습은 과연 행복할까?’ 자신만의 전문성을 개발하길 원했지만 회사는 다방면에 유능한 인재를 요구했다. 업무량이 늘면서 건강도 나빠졌다. 자신의 행복이 뭔지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럴수록 모든 일에 의욕이 떨어졌고 무기력해졌다.

변화를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시간이 너무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점점 힘이 붙었다. ‘건강, 운동’과 관련된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전문성을 키울 순 없었다. 2주 동안 고민했다. 마음은 확고한데 불확실한 미래에 선뜻 투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다. “무엇을 하든 먹고살 길은 있으니 하고 싶은 것을 해라”라고….

회사를 그만둔 뒤 박 씨는 더 바빠졌다. 서울 중구의 한 헬스장에 취직해 관리를 하며 운동을 배웠다. 허리디스크, 수술 후유증 등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상담해주고 별도의 트레이닝법을 고민했다.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올바른 재활법을 제시하기 위해 해부학, 생물학도 틈틈이 공부하고 있다.

박 씨는 “회사에 앉아 있을 때보다 내 몸을 만들고 공부하는 과정이 더 힘들지만 매 순간 살아있음을 느낀다”며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일상에 안주하며 살았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희열”이라고 말했다.

▼ 대기업 그만두고 여행드로잉 작가 된 김현길씨 ▼


2013년 삼성전자를 퇴사한 뒤 여행드로잉 작가가 된 김현길 씨. 김 씨는 “어릴 적 꿈을 이뤄 진정 행복하다”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선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드디어 ‘여행드로잉 작가’가 됐다. 어릴 적부터 소망한 꿈을 이룬 거다. 순탄한 길은 아니었다. 막연히 하고 싶다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김현길 여행드로잉 작가(32)는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 세밀한 전략, 시간을 투자했다”며 “그렇게 끝까지 용기를 낸 결과 현실을 바꿀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2010년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사업부에 취직해 연봉 5000여만 원을 받으며 안정된 삶을 누렸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짜인 목표를 수행했다는 안도감만 있을 뿐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시간은 점점 줄었다. 회의감이 밀려왔다. 결국 2013년 9월 회사를 그만뒀다.

김 작가는 행복을 찾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주말여행을 하며 미래의 밑그림을 그렸다. 여행지에서 공책에 낙서를 하는 시간은 그에게 즐거움을 다시 일깨워줬다. 이런 감정을 공유하고 싶어 블로그도 적극 활용했다. 단순히 여행지를 그린 그림뿐 아니라 글까지 게시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는 그렇게 여행드로잉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선 목표가 필요했다. 자신만의 브랜드를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리모’라는 필명으로 여행드로잉 에세이집을 냈다. 출판사와 계약하는 과정은 작가로서 가능성을 시험받는 기회였다. 글과 그림으로 세상에 도움이 될 가치를 쉽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는 스스로를 돌아봤다. 과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만화를 그리는 거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연습장 13권에 그린 창작만화는 전교생이 돌려보는 만화책이었다. 어느 날 이 만화책이 학생주임 선생에게 적발됐다. 선생님은 무서운 얼굴로 교무실로 김 작가를 불렀다. 그러곤 “12권까지는 봤는데 나머지 한 권은 누가 갖고 있느냐”고 말했다. 그 실력을 인정해 준 것이다.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가족의 반대는 무시할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만화고교 대신 인문계 학교에 진학했다. 학교 미술부에 들어갔지만 입시 위주의 미술은 만화와는 전혀 달랐다. 미술대학 진학의 꿈도 접어야 했다. 그 대신 그래픽디자인을 할 수 있는 컴퓨터공학과에 들어갔다. 그는 2009년 경북 영주에 있는 한 마을에 들어가 7일간 무료로 벽화를 그리고 웹툰도 올렸다. 그림 그릴 때 그는 가장 행복했다.

김 작가는 “안정된 직장 대신 어렸을 적부터 꿈꾸던 그림 그리는 일을 하는 지금이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 3년간 ‘삼성맨’… 이번엔 파일럿에 도전 오현호씨 ▼


한때 ‘삼성맨’이었던 오현호 씨는 현재 한국항공대 비행교육원 조종훈련생이다. ‘중력을 거스르는 일’을 해야 행복하다는 그는 “변명하는 동안 꿈은 멀어져 간다”고 했다.

2012년 3월. 3년여 동안 근무했던 삼성전자 중동 총괄 사업부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좋은 정장을 입고 다니며 세계 곳곳을 오가는 삶이었다. 한때 ‘삼성맨’이라는 주변의 부러움 섞인 시선도 즐겼다. 그래도 공허한 마음을 채울 길이 없었다. 연봉 5000여만 원이 주어지는 안정된 삶을 박차고 나온 오현호 씨(31)는 한국항공대 비행교육원에서 조종훈련생으로 자신만의 행복을 위한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그의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은 종합 7등급이었다. 반 석차 49명 중 43등. 구체적인 꿈은 없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2003년 해병대에 들어갔다. 힘들긴 했지만 군대는 맡은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고 성실히 수행하면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병장 때도 먼저 쓰레기를 줍고 청소했다. 리더가 움직이니 전 부대가 움직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오 씨는 불가능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2005년 5월 경기 파주시 임진각에서 시작해 3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2006년 1월 영어를 배우고 싶어 무작정 호주로 떠났다. 스쿠버 다이빙 마스터 자격도 얻었다. 2008년 8월 아프리카 3대 산 중 하나인 르웬조리, 2009년 9월에는 히말라야에 올랐다. 2010년 10월 사하라 사막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하루에 40여 km씩 6일 동안 총 250km를 뛰었다.

무엇 하나 쉬운 것은 없었다. 그래도 깨달은 것이 있었다. “대학 가면 해야지, 취직하면 해야지”라고 변명할 때마다 꿈은 점점 멀어져 간다는 사실이었다. 몸은 정신을 지배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주저하지 말고 그 일이 있는 장소를 찾아 몸으로 부딪쳐야, 오 씨의 각종 도전과 꿈은 현실이 됐다.

오 씨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중력을 거스르는 일’을 해야 행복하다는 것.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중력을 거스를 수 없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무모하게 도전해 그것을 넘어설 때 행복감이 밀려왔다. 2013년 10월 항공대 파일럿 프로그램에 합격했다. 비행기 조종사라는 또 다른 꿈의 시작이었다.

오 씨는 “궁핍했던 어린 시절, 수능 7등급, 왜소했던 몸 등 결핍을 벗어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삶의 원동력이자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경험을 엮은 책도 썼다. 마지막 꿈은 좀 더 구체적이다. 비행기 조종석에 앉을 수 없는 장애인, 암 환자, 청소년 등을 경비행기에 태우고 세계 일주를 하는 것. 꿈을 말하는 오 씨의 눈은 반짝거렸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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