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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메드] (여행칼럼) 영혼을 씻어내는 자연으로, 호주 태즈매니아

입력 | 2015-11-26 16:11:00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건 인류가 생겨나고 소멸될 때까지 변함없는 진리다. 몸의 안락을 좇아 도시로 떠났던 사람도 마음의 위안을 찾아 자연으로 향하게 되는 건 순리에 가깝다. 그 어떤 우리도 자연 앞에 서면 모두 똑같은 존재다. 그저 왔다가 한 줌 흙이 되어 다시 자연의 일부가 된다.
 
 
칼럼니스트•포토그래퍼 감성사진사 이두용
 
 
상상은 현실이 되다: 기대
  
지하철역을 지나다가 벽 한쪽을 가득 메운 포스터에 자연스레 눈이 갔다. 아름다운 자연을 찍은 큼지막한 사진에 ‘호주만큼 멋진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라는 카피가 쓰여 있다. 피식 웃고 지나쳤다. ‘세상에 멋진 곳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호주를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항공사 부스에서 짐을 부치고 비행기를 타기 위해 게이트로 향하는데 문득 지하철역에서 마주친 카피가 생각났다. 그땐 웃어넘겼는데 갑작스레 직접 가게 되니 과장스럽던 홍보 문구가 고스란히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어떤 나라일지, 멋지다는 의미는 어떤 것인지, 내겐 어떤 멋진 경험이 생겨날지. 풍선에 바람이 채워지듯 가슴속 기대감이 부풀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월터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나는 비행시간 내내 상상력을 총동원해 머릿속에 호주를 그렸다. 내게 호주는 점점 판타지 영화에서 묘사하는 천국의 이미지로 바뀌고 있었다.
 

멜버른에 도착했다. 하지만 목적지는 태즈매니아. 다시 호주 국내선을 타고 론체스톤 공항을 향해 날았다. 익숙할 리 없는 호주지만 태즈매니아는 더 낯설었다.
  

호주 사람에게 태즈매니아에 대해 물었더니 “아름다운 자연”이라는 짧은 답이 돌아왔다. 나라 전체가 국립공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호주.
  
태즈매니아는 호주에서도 최고의 청정지역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자국민조차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니 지하철역 포스터 속 자연이 마치 현실이 될 것만 같았다.
 
 
꿈속을 지나 숲으로: 설렘
  
공항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또 한참을 달렸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가 싶더니 작고 하얀 등대 앞에서 멈췄다. 그곳엔 현지인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보니 이미 와 있는 사람도 여럿이다. 미국과 독일, 말레이시아 등 떠나온 나라도 제각각이다.
 
“제가 배낭을 하나씩 드릴 테니 4일간 사용할 최소한의 짐만 담아주세요. 여기서부터 숙소까지는 배낭을 메고 걸어서 가야 합니다.”

자기를 인솔자라고 소개한 청년은 등대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큼지막한 배낭을 하나씩 나눠주고 10분 동안 짐을 꾸리라고 했다. 다들 어이없어했지만 가져온 캐리어와 가방을 열어 옷가지와 카메라, 세면도구 등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 역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멍하니 있다가 분위기에 이끌려 가져온 짐 중에 필요한 것만 챙겨 배낭에 담았다.
 

10여 분이 지나자 등대 앞은 배낭을 짊어진 길다란 행렬이 생겼다. 그리고 인솔자의 뒤를 따라 우리는 해변을 향해 걸었다. 마치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피리 소리를 따라 움직이는 아이들 같았다. 나머지 짐은 타고 온 버스에 다시 실어서 어디론가 떠났다.
  
언덕을 하나 넘으니 해변과 길이 이어졌다. 해변에 오르니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진다. “Amazing!”, “Wonderful!”, “Beautiful!” 해무가 낮게 깔린 해안은 마치 꿈속을 묘사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구름도 땅과 맞닿아 비현실적인풍경을 만들어줬다.
 
맨 앞에 걷던 사람이 신발을 벗자 도미노 블록처럼 한 명씩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서 신발을 벗어 한 손에 들었다. 발가락에 닿는 모래가 따뜻하다. 걸음마다 발가락 사이로 파고들며 간질인다. 장애물 하나 없는 해안이라 가만히 눈을 감아봤다.
 
비릿한 바다냄새, 볼에 와 닿는 시원한 바람, 귀에 속삭이는 잔잔한 파랑소리. 해무를 끌어안은 따뜻한 기운이 몽롱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해변과 몇 개의 나지막한 사구를 지나며 2시간을 걸었다. 멀리 어스름이 내리는 하늘 아래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숲의 맨 안쪽 정상에 빨간 건물 하나가 보였다.싱그러운 초록과 대비돼 아름답다. 꿈속을 걸어온 우리가 며칠간 묵을 곳이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자연으로 스미다: 벅참
    
이곳의 이름은 베이오브파이어로지(bay of fires lodge). 전체가 목조인데 아름답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멋진 건물이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지은 그림 같은 집이랄까. 대자연에 일부가 되어 자연이 주는 청정함과 고요함을 오롯하게 누릴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 그렇다보니 보기와는 달리 숙소로는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곳이었다.
 

땀 흘리며 걸어온 터라 먼저 샤워를 하려고 했는데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공용인 샤워실은 입구에 설치된 펌프를 이용해 30~40회 정도 열심히 들었다 놨다 해야 5분 남짓 땅속의 물을 끌어올려 사용할 수 있었다. 대충 몇 번 펌프질하고 샤워에 들어갔다간 비누 거품을 뒤집어쓰고 나오기 일쑤였다. 나중엔 2인 1조로 샤워하는 진풍경도 생겼다.
 
물이 없으니 화장실도 달랐다. 남녀 구분이 없는 화장실은 사용 후에 각자 알아서 준비된 톱밥을 부어서 후처리해야 했다.전기도 없었다. 태양전지를 이용해 복도와 주방에만 전등을 사용했다. 그마저도 컴컴한 밤에 낮은 밝기로 쓰는 정도.
  
휴대폰은 물론 가져간 전자제품은 무용지물이 됐다. ‘혹시 연락 온 곳은 없나’ 싶어 휴대폰을 켰다 끄기를 여러 번. 숙소 주위를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휴대폰 신호가 잡히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
 

시나브로 내 삶의 일부가 되었던 문명의 이기들. 잠시만 사용하지 못해도 불편하고, 불안하고, 궁금했던 그것들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짐이 되어가고 있었다.
 
둘째 날이 되면서 전자제품은 처음 메고 온 배낭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자연스레 눈과 귀, 마음이 자연으로 향했다. 우리네 가을을 닮은 한 없이 푸른 하늘과 유채화처럼 푸르고 빽빽한 나무들, 시시각각 낯빛을 바꾸는 천의 얼굴의 바다. 이따금 캥거루와 똑 닮은 왈라비가 내 방 창문까지 찾아와 날 물끄러미 보다가 가기도 했다.
 
숲으로 향한 벽 하나가 통창이라 어느 순간 난 자연에서 지낸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자연의 일부로 살며: 치유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며칠간이지만 어두워지면 잠들고 해가 뜨면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종일 피곤하지 않았다. 음식은 유기농으로 키운 재료로만 만들어서 내왔다.
 
식사를 하면 숲으로 들어갔다. 바위에 누워서 책을 읽기도 하고, 그루터기에 앉아 차를 마시기도 했다. 깨끗한 물에 담가서 몸과 마음을 찬찬히 헹궈내는 시간 같았다.
 
로지에서 운영하는 숲과 해변의 트레킹과 호수에서의 카약도 참여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우리지만 느끼고 있는 자연은 비슷했다.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선 보통 한 시간씩 숲을 걸어가거나, 무릎까지 오는 물길을 지나서 갔는데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이따금 굵은 소나기가 나타나도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했다. 춤을 추는 친구도 있었다.
 

4박5일은 빨리 지났다. 멜버른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는데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목욕탕에 다녀온 느낌이었다. 개운했다. 멜버른에선 도시 한가운데 있는 호텔에서 묵었다. 숲 속의 숙소보다 훨씬 편하고, 세련되고, 내게 익숙한 것들 투성인 이곳.
 
하지만 이상스레 난 어두워져도 불을 잘 켜지 않았다. 그냥 잠들었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 낯선 도시에서 조깅을 했다. 한국에서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TV를 켜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일도 없었다. 노트북을 켜도 필요 이상의 시간을 붙잡고 있지 않았다.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방송 카피가 있다. 그런데 이따금 쉬는 날인데도, 실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온전하게 쉬지 못할 때가 있다. 몸은 쉬고 있지만, 마음은 분주함의 굴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을엔 가끔 스마트폰을 꺼두자. 하루쯤 내가 없어도 생각보다 세상은 잘 돌아간다. 이 좋은 가을, 가까운 숲을, 고요한 바다를, 푸른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길을 찾아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내가 혹은 당신이.
 

COLUMNIST 이두용
 
월간 아웃도어 편집장, 뮤지션으로 10년 넘게 살면서 책·음반·여행사진을 찍으며 사진에 입문했다. 2009년 중동 요르단 5개 지역에서 사진전과 함께하는 거리 축제를 열었다. 영국 공군이 주최하는 사진전과 심장병 어린이 기금마련 국제행사에 초청 전시했다.
 
 EBS <세계테마기행> ‘요르단편’ 진행자를 시작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중이다. 저서로는 <오늘부터 행복하다>(부즈펌)이 있다.
 
 기사제공 = 엠미디어(M MEDIA) 라메드 편집부(www.ramed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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