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신부: 아니 저런, 누굴 섬겼단 말이오.
나: 지름신입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보면 참지 못하고 ‘지른다’는 뜻의 이방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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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H&M’과 ‘발맹’의 컬래버레이션(협업) 옷을 샀습니다.
신부: 한국에서 엿새간 구매 노숙 행렬이 이어졌다던데, 노숙을 했단 말이오.
나: 5일 오전 8시부터 세 시간 만에 거의 다 팔렸다기에, 노숙 행렬이 휩쓸고 간 흔적을 보려고 오후 7시 명동 매장에 갔더니 일부 과감한 디자인의 옷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가슴이 V자로 깊게 파인 초록 반짝이 미니 원피스를 입어 봤는데, 의외로 어울렸어요. 잠깐 망설이다가 심호흡 한 번 하고 그냥 나왔습니다.
신부: 그런데 무슨 죄를 지었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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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발맹 오리지널을 샀다는 건가요.
나: 아이고, 아니에요. 명품관에서 가까운 H&M 압구정점으로 갔더니 뜻밖에도 전날 구매자들이 환불한 옷이 여럿 있었어요. 탈의실로 가져가 마음 편히 입어본 후 턱시도 스타일의 긴 조끼(13만9000원)를 샀습니다.
신부: 발맹이 나 젊었을 때엔 이렇게 명품 소리를 못 들었던 것 같은데….
나: 발맹이 ‘뜬’ 건 몇 년 안 됐어요. 무분별하게 라이선스를 팔아 2003년 파산신청까지 했던 ‘피에르 발맹’에 투자가 들어오면서 브랜드 이름을 ‘발맹’으로 바꾸고 새 수석 디자이너를 영입했어요. 2009년 어깨에 달걀을 넣은 듯 봉긋한 뽕이 든 재킷과 날씬한 바이커 진을 내놓아 ‘발맹 대박’을 쳤죠. 2011년부터는 20대의 올리비에 루스탱이 디자인을 맡아 잘나가고 있어요.
신부: H&M과 발맹은 왜 손을 잡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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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한국도 섬유 강국 아니오.
나: 과거 섬유는 행세를 했지만 솔직히 패션은…. 서구 미디어가 유행을 만들어 확산하는 시스템에서 우린 독자적 기획력이 부족해 브랜드를 키우지 못했죠. 대기업들도 해외 브랜드 수입 판매에 열을 올렸고. 웃돈을 얹어 되팔려는 H&M 노숙 행렬은 한심하게 볼 게 아니라 실은 정신 바짝 차려야 했던 장면이에요.
신부: 당신이 샀다는 조끼는 좀 비싼 것 같은데….
나: 제 근검절약 의지를 꺾을만큼 ‘발맹’ 디자인이 근사하고 가성비가 높았어요.
신부: 소비의 효용은 개인마다 다 다른데, 무슨 잣대로 단죄하겠소. 과한 지출을 하면 메우느라 고통을 겪지요. 그것이 죄라면 죄고 벌이라면 벌인 것을.
(기자의 실제 쇼핑 경험담을 ‘신부님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책 속 돈 카밀로 신부와의 가상 고해성사로 구성했다)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