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한학자 박래호 선생
평생 한학자의 길을 걸어온 노강 박래호 성균관 부관장. 노강은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한 요즘 인성교육을 통해 무너진 도덕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영철 기자 shjung@donga.com
그는 지난해 7월 성균관 부관장에 임명됐다. 평생을 글을 읽고 가르치며 살아왔을 뿐 다른 세상을 기웃거려 본 적이 없는 ‘딸깍발이 선비’에게 유림이 최고의 예우를 한 것이다. 지난달 18일에는 서울 경희궁에서 열린 조선왕조 과거제도 재현 행사에서 시관(試官)으로 뽑히는 영예도 안았다. “조선시대에는 정3품 이상의 품계를 가진 당상관이 시관을 맡았어요. (시관까지 해봤으니) 한학자로서 소원을 이룬 셈이죠.”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선비학당 학장도 22년째 맡고 있다. 필암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 선생(1510∼1560)의 학덕을 추모하는 곳이다. 국가사적 제242호.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피해를 보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그동안 선비학당에서 그에게 글을 배운 사람이 2000명이 넘는다. 이들 중에는 고전 번역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도 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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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마치고 스물두 살 때 전남 곡성 출신의 동갑내기 규수와 결혼을 했다. 결혼 이듬해 모내기를 하다 허리를 삐끗한 뒤로 거동이 편치 않았다. 걷거나 서 있는 게 불편해 침을 맞아보기도 하고 병원에도 다녀봤지만 좋아지지 않자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았다.
그는 20대에 훈장을 지냈다. 1965년 이후 전남 화순군 북면 곰실마을에서 6년간 서당 아이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훈장을 하면서 학문의 깊이가 더해졌습니다. 예기(禮記)에 나오는 ‘교학상장(敎學相長·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한다)’의 의미를 그때 깨달았어요.”
30대로 접어들어 선조들이 대대로 살았던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로 돌아왔다. 아곡리는 조선시대 3대 청백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아곡 박수량 선생(1491∼1554)의 고향이다. 아곡은 백비(白碑)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장관급 관직에 있으면서도 사사로이 재물을 취하지 않아 그가 남긴 유품은 임금이 하사한 술잔과 갓끈이 전부였다고 한다. 세상을 뜨면서 “묘도 쓰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자 이에 감동한 명종이 서해바다 암석을 골라 하사해서 세운 것이 바로 ‘백비’다. 아곡은 노강의 15대조다.
노강은 호남의 대표적인 한학자인 산암 변시연 선생(2006년 작고)을 만나면서 선비의 기개와 꼿꼿함을 배웠다. 산암은 조선 초기 서거정 등이 완성한 시문집인 동문선(東文選) 이래 가장 방대한 한국 시문집으로 꼽히는 ‘문원(文苑)’ 73권을 펴내 유림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노강은 문원 제작에 참여하면서 한학의 내공이 더 깊어졌다. 덕분에 면앙정 송순의 시집, 옥봉 백광훈 시집, 녹천 고광순 문집 등 고문집 30여 권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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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3대 청백리로 꼽히는 아곡 박수량 선생의 묘 앞에 세워진 백비. 백비는 청렴을 배우려는 공직자들의 순례코스다. 동아일보DB
그가 평생을 두고 화두로 삼아온 선비정신의 핵심적 가치는 뭘까. 세속적 이익을 억제하고 인간의 성품에 뿌리를 둔 ‘의(義)’이다. “논어에서 가장 애송되는 구절 중 하나가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입니다. 이로움을 보았을 때에는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에는 목숨을 바치라는 글귀입니다. 의리에 밝은 사람이 바로 참 선비라고 할 수 있죠.”
그는 인터뷰 말미에 ‘爾等與吾不戴共天之수(이등여오부대공천지수)’라는 한자를 써 보여줬다. ‘너희들은 우리와 더불어 같은 하늘 아래에 살 수가 없다’는 뜻이다. 글귀를 쓴 연유를 물었더니 기회가 온다면 일본의 역사왜곡을 준엄하게 꾸짖는 1인 시위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일본 정부청사 앞에서 이런 글귀를 목에 걸고 당당하게 항의를 하고 싶습니다.” 강단진 모습에서 추상같은 선비의 결기가 느껴졌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