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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김영남 송환 여론압박에… 南北 “특별상봉에 포함시키자”

입력 | 2015-10-24 03:00:00

[광복 70년/ 한국 외교사 명장면]
2006년 상봉 하이라이트 ‘메구미의 남편 김영남’




2006년 6월 28일. 납북자 김영남 씨(당시 45세)와 팔순의 어머니 최계월 씨(당시 82세)가 금강산에서 극적으로 만났다. 당시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두 사람의 상봉이었다.

두 달 전 김 씨는 일본 납치 피해자 문제의 상징인 요코타 메구미 씨(1977년 납북)의 남편으로 밝혀졌다. 그 전까지 요코타 씨 남편은 김철준이라는 이름만 알려져 있었을 뿐 베일에 싸여 있었다. 김영남 씨의 존재가 드러나서야 최 씨는 1978년 고교 시절 북한에 납치된 금쪽같은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납북자가 북한에서 부부가 됐다는 기막힌 소식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김 씨가 세상에 알려진 막후에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의 노력과 일본 정부의 역할이 있었다. 북한은 김 씨의 정체가 밝혀진 뒤에도 상당 기간 상봉 요구를 거부했다. 6월 김 씨 가족 상봉 성사 이면에는 남북 간 비공개 접촉이 있었다.

이야기의 실마리는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 대표는 중국에서 만난 북한 관계자에게서 “요코타 씨의 남편이 납북된 한국 학생”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학생 시절 납북된 사람은 5명이었다.

그는 2006년 초 한국과 일본 정부에 이들 5명의 가족으로부터 채취한 유전자(DNA)와 요코타 씨의 딸 김혜경(나중에 진짜 이름이 김은경임이 밝혀진다)의 DNA를 대조할 것을 공식 요청한다.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2002년 평양에서 김은경을 만났을 때 확보한 DNA를 갖고 있었다.

최 대표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 등에게 이런 요청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일본 정부는 즉각 반응을 보였다. 1주일 만에 외무성 고위 관계자가 한국을 찾아 L호텔에서 4차례 최 대표와 만났다. 이후 일본 정부는 한국 납북자 5명 가족의 혈액과 모근을 채취해 일본으로 가져간다.

반면 한국 정부는 최 대표의 요청에 별다른 답이 없었다. 최 대표는 “당시 통일부가 내게 자제를 요청하기까지 했다”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납치된 국민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외면했다고 비판했다.

2006년 4월, 일본 외무성은 김은경 씨와 김영남 씨의 DNA가 혈연관계일 가능성이 높다고 공식 발표한다. 한국은 충격에 휩싸였고 김영남 씨의 송환, 가족과의 상봉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하지만 북한은 상봉 요구를 거부했다.

여론의 압박이 심해지자 2006년 6월 제14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앞두고 정부는 통일부 실장급 인사를 북한에 보내 “김 씨를 상봉 대상자에 포함시키자”고 제안했다. 북한은 6월 7일 김 씨 가족 상봉을 특별상봉으로 마련하기로 했다고 밝힌다. 납북자 김영남 씨의 존재를 북한이 처음으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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