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내 생애 최고의 의술]‘가성 장폐색증’ 11살 인공항문 고통에서 구하다

입력 | 2015-10-19 03:00:00

박귀원 중앙대병원 소아외과 교수




박귀원 중앙대병원 소아외과 교수(가운데)가 12일 이찬혁 군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박 교수 옆에 있는 김엄지 소아병동 간호사는 16년 전 박 교수로부터 담도낭종 수술을 받은 인연이 있다고 한다. 박 교수는 “치료한 아이가 잘 자라난 모습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가성(假性) 장폐색증은 희귀 질환 중에서도 매우 희귀한 편에 속합니다. 원인도 알려지지 않았죠. 그렇다 보니 치료도 매우 어렵습니다.”

아이는 만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가느다란 팔다리에 너무 말라 눈이 유독 커 보였던 이찬혁 군(11). 2013년 처음 수술을 받은 후 올해에만 연달아 두 차례 수술을 한 아이에게 또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박귀원 중앙대병원 소아외과 교수(66)는 이번이 아이에게 마지막 수술이 될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찬혁아. 울 일이 아니야. 이 수술만 하면 더이상 배에 주머니 차고 다니지 않아도 돼. 너랑 똑같은 증상이 있었던 형이 있었는데, 수술 후 잘 먹고 잘 자라서 키가 175cm까지 컸어. 선생님 믿지?”

이 군은 어릴 적부터 소화가 잘되지 않았고 복통과 변비에 시달렸다. 항상 배에 가스가 차 빵빵한 상태로 지내다 보니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2013년 초 갑자기 이 군의 배가 만삭 임신부처럼 부풀어 올랐고 극심한 복통과 구토가 거듭됐다. 급기야 장 내 가스로 인해 위가 찢어지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그해 7월 이 군은 대학병원을 찾았고, 병원에서도 아이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해 개복 수술을 했다. 하지만 증상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후로도 이 군은 배가 차오른 채 제대로 먹지도, 배변도 잘하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됐다. 병원에선 올해 초 복강경 수술을 통해 맹장을 제거하고 장의 유착(엉겨 붙은 상태)된 부분을 떼어냈지만 차도가 없자 곧바로 소장 끝 부분을 배 밖으로 꺼내놓는 수술을 했다. 대장과 항문이 아니라 소장과 인공항문을 통해 배변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이 군은 배에 배변 주머니를 찬 채 6월 박 교수를 찾아왔다.

박 교수는 이 군의 상태를 보자마자 ‘가성 장폐색증’이라고 진단했다. 이는 장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도 장이 막힌 것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는 증상. 장이 움직이지 않으면 음식물이 소화, 흡수되지 않고 배변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또 장 내에 유해 가스가 가득 차게 된다.

보통 음식물은 소장에서 6시간, 대장에서 24시간 머물다가 배변된다. 48시간까지 배변되지 않은 경우는 변비로 간주한다. 하지만 5∼7일간 음식물이 대변으로 나오지 않으면 장폐색증일 가능성이 높다. 소장이나 대장의 신경이나 조직에 문제가 있거나 종양 및 유착이 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인데, 치료법 역시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서 시작한다. 보통 대장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아 증상이 심하면 대장을 제거하고 소장과 항문을 연결해주는 수술을 한다.

그런데 가성 장폐색증은 신경이나 조직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도 장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치료법도 마땅치 않다. 하지만 박 교수의 머릿속에 18년 전 같은 증상으로 찾아왔던 당시 3세 된 아이가 떠올랐다. 영양실조가 심해 사망 직전 상태였다. 당시 박 교수는 고민한 끝에 “장폐색증은 아니지만 증상이 똑같으니 대장을 자르는 수술을 해보자”고 부모에게 제안했다.

“그 아이는 상태가 더욱 심각해 위까지 제거해야 했지만 수술은 대성공이었어요. 이후 소장이 활발히 움직이며 위와 대장의 역할까지 거뜬히 해냈죠. 어른이 된 후 만난 적이 있는데 잘 자랐더군요. 겉으로만 보면 소장만 있는 사람이라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죠. 찬혁이는 더 예후가 좋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8일 박 교수는 이 군의 대장을 제거한 후 소장과 항문을 이어주는 수술을 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곧바로 소장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틀 후엔 인공항문이 아닌 진짜 항문을 통해 대변이 나왔다. 이 군의 어머니 문은희 씨는 “아이가 살아나더라도 평생 대변 주머니를 차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아이가 항문을 통해 똥을 싼 그날 온 가족이 매우 기뻐했다”고 전했다.

18일 현재 이 군의 상태는 더욱 좋아졌다고 한다. 복통과 배에 가스가 차는 증상이 거의 없어졌다. 이 군은 장이 잘 움직이도록 시간이 날 때마다 걷는다고 했다. 어머니 문 씨는 “아이가 이번에 제대로 낫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소아외과 분야의 ‘대모’로 불린다. 1979년부터 지금까지 수술한 어린이 환자는 3만여 명. 주로 소아탈장 수술과 선천성 항문 직장 기형 수술, 신생아 응급수술을 맡았다. 하지만 이 군 같은 가성 장폐색증은 박 교수도 지금까지 불과 15명만 치료했으며 이 군처럼 실제 대장 절제 수술을 한 아이는 5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희귀 질환이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내 손을 거쳐 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산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며 “찬혁이도 더이상 수술받을 일 없이 밥 잘 먹고 똥 잘 싸면서 건강하게 잘 살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 ‘가성 장폐색증’ 영·유아-아동기에 주로 발생… 심하면 대장 절제 수술 ▼


‘가성 장폐색증’은 장이 막혔을 때 발생하는 증상이 ‘가짜’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신경이나 조직에 문제가 없고 종양이나 유착이 생긴 것이 아닌데도 장이 막힌 것처럼 매우 느리게 움직인다.


우선 1주일 이상 대변을 보지 못하는 등 배변이 일정하지 않다. 그리고 심한 복부 팽만감과 복통, 구역질, 구토, 혈변, 설사,변비 등이 동반된다. 영양분이 장을 통해 흡수되지 않아 영양실조로 이어지고 심하면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 신생아를 포함해 영·유아 및 아동기에 주로 발생한다.

장폐색증이라면 원인을 찾아 처치하면 되지만 가성 장폐색증은 원인을 알 수가 없어 치료가 어렵다. 증상이 심각하면 중증 장폐색증처럼 수술을 통해 치료한다.


우선 인공 항문을 만들어 소장 끝을 배 밖으로 꺼내 놓는다. 소화 과정에서 대장을 배제하는 것이다. 3∼6개월 후 다시 장을 집어넣으면 소장과 대장 운동이 정상화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호전이 없을 경우 이찬혁 군처럼 대장 절제 수술을 통해 치료해야 한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