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종 국제부 기자
이전 정부들도 채무 증가에 따른 경고음을 들었지만 철저히 외면했다. 예산을 줄이면 다음 총선에서 패할 게 뻔했다. 크레티앵 총리는 자신이 속한 중도 좌파의 자유당이 다음 총선에서 지더라도 경제 정상화가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세금을 늘려 재정 적자를 막기보다는 예산을 줄이는 근본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증세를 통한 예산 증액은 미봉책으로, 건전한 성장을 막는다고 봤다.
크레티앵 총리는 ‘작지만 현명한 정부’를 만들겠다고 국민을 설득했다. 정치적 라이벌인 폴 마틴을 재무장관에 기용했다. 내각은 회의적이었다. 크레티앵 총리는 각료회의에서 “예산 증액을 요구하면 해당 부처 예산의 20%를 줄이겠다”며 경고했다. 그런 다음 실업급여 수급자를 줄였다. 국방과 해외원조 예산도 깎았다. 산업부가 54개의 사업을 제안했으나 11개만 허가를 받았다. 부처별로 5∼65%의 예산이 삭감됐다. 공공 부문의 인력도 14% 줄였다. 정치권의 불가침 영역이던 연금과 복지 정책까지 손을 댔다. 1993년부터 2000년 사이 복지 수혜자가 100만 명 이상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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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올해 38.5%, 내년 40.1%로 전망된다. 외환위기를 겪던 1997년에도 12.3%에 불과했다. 정부는 순채권국이라 재무건전성이 나쁘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채무 증가 속도가 매우 빠르다. 이제 예산 다이어트도 고려할 때다. 크레티앵 총리는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않았다. 미봉책보다는 근본 해결책을 선택했다. 신념이 확고해졌을 때는 국민과 의회를 상대로 노련한 리더십도 보여줬다. 다음 총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숙한 캐나다의 유권자는 그의 진정성을 꿰뚫어봤다. 크레티앵 총리는 1993년 이후 2번의 총선에서 승리했고 10년 동안 총리 자리를 지켰다.
이유종 국제부 기자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