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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귀환길에 함께한 사람들 ‘전쟁할 수 있는 日’ 막는 희망될것”

입력 | 2015-09-21 03:00:00

14년째 유골 발굴-송환 참여 일본인 여성 미치마타씨




해질 무렵 하늘이 검게 물들던 19일 오후 7시. 서울광장 잔디밭 한쪽에 하얀 직사각형 깃발 뒤로 수십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이들의 손엔 광목천으로 싸인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길을 가던 시민들은 낯선 광경에 발길을 멈췄다. 흰 상자의 행렬을 따르던 미치마타 가오리(道又嘉織) 씨(32·여·사진)의 눈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준비된 단상 앞으로 행렬이 들어서고, ‘일제강점기 강제 노동 희생자들의 유골이 7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태극기 배지를 가슴에 단 할아버지는 연신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을 했다. 지켜보던 한 젊은 커플은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었다. 70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일본 강제 노동 희생자들의 장례식이었다.

미치마타 씨는 115위의 유골이 한국으로 돌아온 18일 서울을 찾았다. 일본 혼슈 니가타 현에 살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인 그는 이번 행사를 위해 휴가까지 냈다. 그는 “동료들에게 쉬는 이유를 설명했지만 대부분 잘 이해를 못했다”라고 말했다. “침략의 역사가 있었다는 건 알지만 홋카이도에 왜 조선인들이 왔는지 상상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생각의 차이가 상당하다”라고 덧붙였다.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함에도 미치마타 씨가 한국을 찾은 이유는 그가 13년 전부터 발굴 작업에 참여해 왔기 때문이다. 2001년 자신보다 먼저 발굴에 참여한 언니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이듬해 함께하기 시작했다. 그는 홋카이도 사루후쓰(猿拂) 촌 아사지노(淺茅野) 일본군 비행장 건설 현장 등의 발굴에 참여했다.

그는 작업이 “즐거웠다”고 했다. “하지만 땅을 파다 보면 흙이 조금씩 검게 변해 있다든지, 사인(sign)이 보일 때가 있죠. 그러면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요.” 그럴 때면 모두가 진지하게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흔적이 땅 위로 나오는 순간. “누구도 말을 잇지 못하죠. 친구의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인 거잖아요.”

그가 한일 관계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고등학생 때 일본 사람인 줄 알았던 같은 반 친구가 재일교포임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친구의 형을 만나 ‘학교에서 공부하는 건 우리 역사도, 우리말도 아니야’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런 기분이 어떤 기분일까, 재일교포라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궁금해졌죠.”

17일 도쿄에서 안보법안 통과 반대 집회에 참가했던 그는 “일본인들도 법안 통과에 절망스러워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희망’을 이야기했다. 많은 일본인들이 역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서로 소통하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온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에 참여한 일본인도 저 말고 여러 명이에요.”

미치마타 씨는 20일 자신의 손으로 희생자의 유골을 경기 파주시 서울시립묘지에 묻었다. 그는 “한 단계를 마무리한 느낌”이라면서도 “아직도 책임이 남았다”고 했다. “강제 징용 역사의 피해자는 한국인뿐이 아닙니다. 역사를 바로잡지 못했기에 일본 사회에서 비슷한 문제가 재생산되고 있어요. 처음 발굴 작업에 참여하면서 ‘친구의 할아버지’라고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들이 저의 문제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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