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새 증인진술 신빙성 없어”… 정액 증거 있지만 강간죄 시효지나
11일 오전 대구고법 제1형사부(부장판사 이범균) 법정. 피고석에 앉은 스리랑카인 K 씨(49)는 책상에 몸을 반쯤 엎드린 채 앞에 있는 통역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는 1998년 계명대 신입생 정은희 씨(당시 18세)를 성폭행하고 물건을 훔친 혐의(특수강도강간)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받은 뒤 이날 항소심 법정에 다시 섰다.
재판장이 선고 이유를 읽기 시작하자 그는 단어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으려는 듯 귀를 세웠다. 새로운 증인 A 씨(스리랑카)가 17년이나 지난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는 것을 믿기 어렵다는 재판장의 말에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올 것이란 걸 알아챈 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정 씨의 속옷에서 나온 정액과 K 씨의 유전자(DNA)가 일치해 강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설명에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 마침내 재판부가 1심과 같은 무죄를 선고하자 K 씨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당초 이 사건은 정액이라는 물증이 있기에 특수강간죄만 적용하면 손쉽게 유죄를 받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대구지검이 재수사를 개시한 2013년 6월에는 이미 특수강간죄 공소시효(10년)가 지났다. 어쩔 수 없이 학생증과 책 3권, 현금 3000원가량을 훔쳤다는 특수강도죄를 덧붙여 특수강도강간(15년)으로 기소했다. 당시 초임 검사였던 최정민 검사가 낡은 기록을 뒤져 가며 K 씨를 재판에 넘겼지만 물건을 훔친 증거를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강간의 증거는 있지만 공소시효를 넘겼고, 물건을 훔친 증거는 없어 무죄라는 결론이다.
조동주 djc@donga.com / 대구=장영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