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소위 선진국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시민계급을 성숙시킨 나라들이다. 시민계급의 성숙은 뭐니 뭐니 해도 그 계급성을 발휘하는 동력인 경제력을 가졌는지가 결정적이다. 자본 축적 없이는 시민계급으로 형성되기도 힘들고 계급적 주도권을 발휘하기도 힘들다. 그 다음은 계급적 책임성이다. 왕이나 영주가 가졌던 책임성을 시민이 갖게 된 것이 시민혁명 아니겠는가. 따라서 시민계급을 위주로 하는 현대 국가에서는 책임성을 자각하는 성숙된 시민의 존재 여부가 그 국가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호의 운명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괜히 하는 과민한 걱정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7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의 국운은 한계에 왔나’라는 글에서 권순활 논설위원은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며 대한민국의 “국운 융성기는 이제 끝난 것 같다”고 말한다.
시민적 책임성을 가진 사람은 제3자적 입장에서 비판만 일삼지 않고, 직접 행위자로 등장하려 애쓴다. 청탁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그 일이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 스스로는 절대 청탁을 하지 않거나 청탁을 거부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갖춘다. 끼리끼리 문화를 비판하기 전에 동문회나 지역의 암묵적 정서를 이겨낸다. 앞차가 끼어들려고 방향 표시등을 깜박이면 오히려 속력을 높여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줄여준다. 우리 사회가 너무 성공 지향적이라고 비판하기 전에 자기는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깊이 들여다본다. 한국 사회가 이웃 간에 정이 사라지고 각박해진다고 비판하기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책을 읽지 않는 우리 사회를 비판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책을 읽는다.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학습 습관을 기른다. 학연, 혈연, 지연에 좌우되는 것이 문제라고 비판하기 전에 자기가 승진하고 싶을 때 학연, 혈연, 지연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남의 불통을 탓하기 전에 불통하는 자신부터 반성한다. 매우 감성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해 버리는 결론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성숙한 시민계급의 성장 없이는 위기 돌파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면, 우선 시민적인 교양을 갖추는 일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