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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길이 생기는 곳

입력 | 2015-07-28 03:00:00


임유진 엑스플렉스 편집장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에, ‘안정’만큼 안정적이지 않은 말이 또 있을까. 안정적인 삶, 안정적인 관계, 안정적인 직장…. 우리는 저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인 양 말한다. 평생 걱정 없이 회사에 다니고, 평생 내 곁을 지켜줄 동반자를 찾고, 그렇게 걱정 근심 없이 지속될 삶을 원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 그 자체뿐이라는 이 오래된 말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개인, 그리고 관계의 근본적인 속성은 바로 ‘변한다’는 것이다. 생성 소멸하므로 우리가,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 바야흐로 안정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수정해야 할 때이다.

최근에 이 안정에 역행하는 꽤 이상한(?) 화가를 만났다. ‘내면초상화가’로 자신을 소개하는 그녀의 이름은 초선영. 화가라고 해서 우아한 아틀리에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서른을 이제 막 넘긴 이 화가는 벼룩시장이나 문화행사장, 혹은 해외 각지를 돌며 작업을 한다.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한 단어를 사람들에게 듣고 즉석에서 그것을 그림과 글로 표현해 주는 일, 그게 내면초상화가가 하는 일이다.

이 초상화 작업의 프로세스를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먼저, 사람들은 처음에 자신을 대표하는 한 단어를 말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사람들은 마치 고차방정식 문제라도 받은 듯 쩔쩔맨다.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에 염색을 새로 할까’, ‘저 신발 나한테 잘 어울릴까’ 등과 같은, 거울을 보고 할 법한 생각들 말고, 우리의 내면을 보고 떠올릴 말은 많지 않다. 흘려보내는 하루의 많은 시간 중에 정작 ‘자신’을 생각하는 시간은 없는 현대인들이다. 그들에게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볼 1분, 그 시간을 선물처럼 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말하는 초선영 화가. 이 화가가 이상한 이유는 다른 사람의 ‘내면’과 ‘행복’이 자신의 행복으로 연결되는 근래 보기 드문 청년인 까닭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약이나 안정에 대한 확신 없이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그녀가 남들이 말하는 안정적인 직장을 찾지 않은 이유는 이후에 자신의 삶을 돌이켜봤을 때 후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친구들처럼 대기업에 가지 않았느냐고, 어떻게 내면초상화가라는 세상에 없던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화가는 이런 말을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주변이 다들 취업 준비로 정신없을 때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뭐였지?’ 내 꿈은 작가가 되는 거였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살고 싶었다. 그런 건 일단 직장에 먼저 들어가고 나중에 할 수 있는 일이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직장인이 되면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기 힘들어질 거라는 생각을 했다.”

가진 게 없는 학생일 때도 이미 화가·작가의 길을 택하는 것에 대해 미래에 성취할 안정과 물질적 보상을 포기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말하는 그.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을 때에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가진 게 많아지면 어떻겠느냐는 그 말이 놀라웠다. 혹 ‘안정’과 ‘철들다’ 내지는 ‘행복’을 유의어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동식 테이블을 들고 유목하며 그림을 그리는 이 초선영 화가의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 습관처럼 “안정이라는 말은 환상”이라는 말을 해온 나에게도, 언뜻 해바라기처럼도 보이는 그녀의 밝은 표정은 충격인 동시에 일종의 증거였다.

그러나 내가 이 화가를 주변에 증거로 내밀며 “결국 안정이라는 건 없어. 삶에서 진짜로 네가 원하는 일을 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손을 내저으며 그건 ‘미담’일 뿐이라고 대꾸한다. 일반적으로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뿐더러 그런 특이한 케이스를 참조해 자신의 삶을 담보 잡히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원하는 삶을 사는 일, 그 일은 어쩌다 ‘위험 부담’의 멍에를 지게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정년 보장, 연금, 퇴직금…. 이런 것들은 물론 지금 당장 근접한 미래에 대한 우리의 불안을 달래주고, 우리 삶이 괜찮은 이유가 되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고 있던 진실은, 이런 안정의 조건들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제발 그래주길 바라는) 우리의 ‘소망’이라는 것이다.

빌 게이츠에게 가장 두려운 경쟁 상대를 묻자 “지금 차고에서 무언가를 개발하고 있을 대학 중퇴자”라고 한 대답은 이미 유명하다. 그러나 모두가 안정, 안정, 안정만을 외치는 한국에 빌 게이츠의 경쟁 상대가 과연 있을까. 위험을 감수하고, 남들의 인정과 상관없는 선택을 기꺼이 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 삶을 인상적으로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인상적일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금, 그 나름으로 인생의 길을 찾느라 악전고투 중인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은 길을 만들고자 하면 길이 없는 곳에 가야 한다는 말. 가장 황폐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 길은 바로 거기서 새로 생긴다.

임유진 엑스플렉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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