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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강수진]외딴방

입력 | 2015-06-23 03:00:00


강수진 문화부장

낮엔 구로공단에, 밤엔 영등포여고 야간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니던 여공은 주산 수업도, 부기책도 싫었다. 새침한 주간 학생한테 체육복 도둑으로 몰리자 무단결석했다. 열흘이 지나 노트 빼곡히 써 온 반성문을 본 담임선생님은 말했다. “너 소설을 써 보는 게 어떻겠니.”

주말에 신경숙 작가의 자전적 소설 ‘외딴방’(1995년)을 다시 꺼내 읽었다. 표절 의혹이 제기된 책들이 아닌 ‘외딴방’을 뽑아 든 건, 등단 30년과 작가인생 최대 위기를 동시에 맞고 있는 그의 초심(初心)을 보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과거는 현재형으로, 현재는 과거형으로 독특하게 쓴 이 작품엔 그의 습작 시절 모습이 담겨 있다. “주산시간에 국어 노트 뒷장을 펴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옮겨본다. … 이제 열일곱의 나는 컨베이어 위에서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노트에 옮기고 있다.”

신 씨가 필사(筆寫)를 통해 문체를 단련한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많은 글쓰기 책에서 그는 필사의 모범 사례로 꼽힐 뿐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에서 필사의 힘을 밝혔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와 한 자 한 자 노트에 옮겨 적어볼 때와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 소설 밑바닥으로 흐르고 있는 양감을 훨씬 더 세밀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부조리들, 그 절망감들, 그 미학들.”(‘필사로 보냈던 여름방학’)

표절 의혹이 불거진 직후 적지 않은 작가들이 그를 감쌌다. 습작 과정에서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거다. 하지만 신 씨는 의혹 제기 하루 만에 너무도 단호하게 모르는 작품이라고 했다. 긴 시간 필사해 온 만큼 혹시나 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보려는 최소한의 자성은 없었다. 독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건 표절 논란 그 자체보다 오히려 그 이후에 보인 신 씨의 이런 태도 같다. ‘전혀 모르는 일’ ‘믿어 달라’는 그동안 너무 많이 속아 온(?) 얘기니까. 그나마도 창비를 통한 ‘대리 발표’였다.

창비는 한술 더 떴다. “(표절 논란 대목을) 굳이 따진다면 신경숙 작가가 오히려 더 낫다”는 입장을 발표해 되레 ‘오만한 갑(甲)’의 이미지마저 덧씌웠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표절 의혹 대목을 비꼬는 수많은 패러디가 등장했다. 급기야 창비는 “본사 문학출판부가 내부 조율 없이 적절치 못한 보도자료를 냈다”고 하루 뒤 다시 입장을 발표했지만 ‘사과인 듯 사과 아닌’ 해명은 역효과만 불렀다. 이젠 백낙청 창비 편집인의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위기관리 측면에서 본다면 창비의 대응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구속까지 불러온 ‘땅콩 회항’의 사과문 이후 최악으로 꼽힐 것 같다. 당시 대한항공은 사과문에서 한 문장만 빼곤 조현아 전 부사장을 두둔하는 변명으로 일관하다 사태를 키웠다.

위기관리 전문가들에 따르면 잘못된 사과엔 유형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변명하는 사과 △거짓과 은폐가 포함된 사과 △때늦은 사과 등이 꼽힌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는 ‘미안해’와 절대 함께 사용해선 안 되는 두 단어로 ‘…그러나(but)’와 ‘그랬다면(if)…’을 들었다. 물론, 공통적으로 꼽는 사과의 필수 요건은 진심이다. 지금이라도 신 씨가 나서서 해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는 것과 반대로 그의 침묵은 길다.

다시 ‘외딴방’. 신경숙은 이 소설의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을 똑같은 질문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이제는, 대답해야 할 때다.

강수진 문화부장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