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표현도 있습니다. “아침에 식사를 하면서 우리 신부님들과 ‘답게 살기’라는 말이 도대체 뭐냐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꼴값이란 말이 너무 비하돼 쓰지 못하는 것 아니냐. (하지만) 자기 분수, 자기 꼴에 대해 제대로 값을 하는 게 ‘답게 살기’의 정확한 뜻 아니냐.”
8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의 답게 살기 운동 선포식에서 나온 조규만 주교의 해석입니다. 조 주교의 말처럼 꼴값의 사전적 의미는 ‘얼굴값’을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몇 해 전 경상도에 있는 큰 절의 주지 스님을 만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여러 보살님(여성 신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 제 입에서 주지 스님의 법명이 언급되자 자리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습니다. 왜 왔느냐, 어떻게 주지 스님을 아느냐 등의 질문이 이어지다 한번 만나게 해 줄 수 있냐는 곤란한 부탁도 있었습니다.
사찰뿐 아니라 성당과 교회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가까운 신부와의 인연으로 모임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이른바 상석에 앉아 갖은 호사를 누리게 됩니다. “남편에게도 주지 않는데 신부님을 위해 특별히 챙겼다”는 술까지 나오더군요.
개신교의 경우 기자들의 출입이 까다롭습니다. 특히 대형 교회는 기업이 아니면서도 홍보실 또는 비서실에 여러 번 전화를 걸어야 담임 목사와의 만남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어려움은 여기까지입니다. 일단 만남이 성사되면 담임 목사와 같이 있고, 대화를 나눈다는 이유만으로 부러워하는 신자들의 시선을 느끼게 됩니다.
요즘 종교인들만큼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경우도 드물죠. 신뢰도나 평판이 나빠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특정 공동체에서 이들은 아직도 절대적인 권위와 존경의 대상입니다.
성직자들은 신앙적인 영역에서 평신자들을 이끌 수 있지만 ‘완전체’는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이들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평신자들의 도움과 비판이 필요합니다. 특히 성직자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위를 부여하는 우리 풍토에서는 눈높이의 대화가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조 주교의 표현을 빌리면 ‘제대로 꼴값하는 성직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