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치영 경제부 차장
혁신은 이미 시작됐다. 정부는 이르면 다음 달부터 은행, 증권사들에 대해 비대면(非對面) 본인 확인을 허용하기로 했다. 은행 고객들이 은행 창구에 가지 않고도 계좌를 열고 금융 거래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0여 년 만에 금융실명제 규제의 근간이 바뀌는 셈이다. 1993년 도입된 금융실명제에 따라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은행 영업점에 가서 창구 직원에게 신분증을 내밀어 본인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아야 금융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정부가 금융회사들에 비대면 본인 확인을 허용키로 한 것은 인터넷전문은행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IT 회사 등 비금융회사가 인터넷전문은행을 설립할 수 있도록 대면 본인 확인 방식을 완화하는 방안을 연구해 왔다. 대면 확인 방식은 오프라인 지점 없이 온라인으로만 예금을 받고 대출을 하는 인터넷전문은행 설립을 막는 핵심적인 걸림돌 중 하나였다.
이런 혁신은 어쩌면 한국의 ‘고장 난 금융’을 고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른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지난달 “금융업이 뭔가 고장 났다. 과감한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전적으로 동감했다. 국내총생산에서 금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3년 7%에서 지난해 5.4%로 떨어지고 금융업 일자리는 작년 한 해 5만 개나 줄었으니 왜 아니겠는가.
고장 난 한국 금융은 금융회사를 떡 주무르듯 다루던 무소불위의 금융당국과 보신주의에 젖은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의 합작품이다. 인허가권을 틀어쥔 금융당국은 진입장벽을 쳐놓고 국내 은행들을 보호해주고 길들였다. 은행들은 적당히 금융당국의 눈치를 보며 정권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 국내 시장을 나눠 먹을 수 있었다. 예대마진(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차이로 얻는 이익)으로만 매년 수천억 원의 이익을 낼 수 있으니 치열하게 경쟁할 필요도 없었다.
경쟁이 없으니 혁신도 없었다. 하지만 핀테크로 무장한 국내외 플레이어들이 시장에 들어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경쟁에서 버티고 시장을 지키려면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고장 난 금융은 자연스럽게 고쳐질 것이다.
은행으로서는 당국의 보호막이 없어지고 무한경쟁에 노출되는 일이 분명 달갑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진취적인 은행장이나 금융회사의 임원들은 지금이 위기에 처한 한국 금융업에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신치영 경제부 차장 higgle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