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흥 논설위원
고래 싸움에 낀 새우라고 모두 등이 터지는 건 아니다. 독립 초기 ‘독새우(poisoned shrimp) 독트린’을 천명했던 싱가포르가 그렇다. 약소국이라 남에게 먹히기 쉽지만 공격하는 쪽도 탈이 날 것이라는 비유였다. 그 나라가 지금은 ‘고슴도치’ 단계를 거쳐 확실한 ‘돌고래’ 국가가 됐다는 평을 듣는다. 돌고래는 지능, 민첩성이 뛰어나고 상어도 공격할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도 있다. 세계 금융, 교역의 허브로 만만치 않은 국방력을 갖춘 강소국(强小國)에 딱 들어맞는다. 중립과 균형을 앞세운 실리외교의 성과다.
싱가포르는 대만에 군사기지를 둔 유일한 국가다. 1974년 리콴유 총리와 장제스 대만 총통이 맺은 성광(星光)계획에 따라 싱가포르군은 대만에서 보병 포병 전차 등을 동원하는 군사훈련을 실시해 오고 있다. 주로 대만 남부 핑둥 현 일대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진 양국의 연합 전술훈련엔 1만 명 정도의 병력이 참여한다.
싱가포르는 한편으론 니미츠급 미국 항공모함 2대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도록 창이 해군기지를 2001년 증축하고 미국의 주요 군사작전을 지원한다. 안보 면에선 동맹과 다름없는 파트너십을 유지한다. 이에 중국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경제 면에선 싱가포르와 특수 관계이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이 리콴유 모델을 참고해 개혁 개방에 나선 이후 싱가포르는 대규모 투자로 화답했다. 미중이 모두 싱가포르의 전략적 중요성을 비중 있게 인정하는 이유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이어서 싱가포르처럼 균형외교만 추구하긴 어렵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 말처럼 쉽겠는가. 우리에겐 미중이 가장 중요한 나라지만 양국의 세계전략에서 한국은 후순위인 것이 현실이다. 선택권은 우리보다는 강대국인 미중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앞으로 더 심각한 선택을 요구받을 수도 있다. 우리가 상황을 주도하기 쉽지 않은 구조다.
게다가 미국으로선 미일동맹이 한미동맹보다 중요하고, 중국으로선 북과의 혈맹을 저버리기 어려운 것도 분명하다. 존 매케인 미 상원의원이 “열렬한 아베 지지자”라고 공언한 것이 기가 막혀도 각 분야에서 촘촘하게 얽힌 미일관계를 한미관계와 냉철히 비교해 보면 미국의 일본 중시를 타박할 수만도 없다.
여러 모로 상황이 녹록지 않지만 그래도 동맹인 미국과 전략적 협력동반자인 중국을 대등하게 봐선 곤란하다. 주권국으로서 동맹에 대해 ‘노(No)’라고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 마땅하나 기본적으론 미래를 함께 열어가는 것이 동맹이다. 한미동맹을 시대에 맞게 리모델링해 더 유용한 자산으로 삼은 토대 위에서 주변국을 설득해 국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실용외교다. 리콴유가 한국 지도자였더라도 그랬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