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욱 정치부장
이회창은 김종필 부인 상가를 방문해 “정치는 남가일몽(南柯一夢·헛된 꿈이라는 뜻)”이라고 했지만 박근혜 정부 당청 라인에 포진한 이회창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2·8 전당대회에서 문재인과 맞붙은 박지원은 ‘실패한 이회창’론으로 문재인을 집중 공략했다. 두 번째 대선 도전에 나선 이회창이 당권 탈환에 집착해 대선 승리를 놓쳤다는 것이다. 박지원은 요즘도 사석에서 “이회창도 9년 10개월 동안 대선후보 1위를 달렸지만 끝내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아직은 누가 대통령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이면서도 대선주자 행보를 하는 문재인의 엉킨 스텝을 꼬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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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대표를 했느냐, 안 했느냐는 변수가 아니다. 오히려 당 대표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핵심은 혁신과 변화를 선도했느냐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는 당 내부를 향해 혁신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성장 대세론에 경제민주화로 반격하며 내전을 촉발한 것이다. 새누리당의 변신은 그 내전의 성과물이었다.
문재인도 ‘변신’에 나서고 있다. 진보좌파 진영과 거리를 뒀던 경제와 노인, 안보라는 3대 이슈를 적극 공략하고 있다. 경제정당을 내걸고, 노인층을 챙기고, 문재인이 야당 대표로서 26일 천안함 폭침 5주년 공식행사에 참석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문재인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한 원로는 23일 문재인을 만나 “경제정당을 아주 잘하고 있다. 이대로만 하면 (당신이) 정권을 잡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재인도 적극 화답했다는 후문이다. 야권에서 ‘문재인 대세론’이 움트는 모양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변신’의 한계도 엿보인다. 논란이 될 만한 뜨거운 이슈는 외면한 채 ‘문재인표 비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 안팎의 강경파 눈치를 살피는 행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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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이 격돌하고 있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에 대해선 더 어정쩡하다. 자신의 생각은 드러내지 않고 우리 외교가 문제라는 질책만 있다. 이완구 국무총리 인준이 쟁점이 되자 “여론조사로 결정하자”는 엉뚱한 카드를 꺼낸 것도 눈치 보기의 전형이다. 당 안팎의 강경파를 의식하다 보니 자신의 태도는 애매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이 자리에 문재인의 생각과 비전은 들어설 틈이 없다. 대선주자에게 자신만의 생각이 없다면 위험하다.
지금 여야 수뇌부만 보면 ‘노무현과 이회창의 2라운드’라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돈다. 문재인은 이회창과 맞섰던 노무현 정부의 시작과 끝을 가장 가깝게 지켜본 당사자다. 문재인의 승부는 결국 자신과 하는 것이다.
정연욱 정치부장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