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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춘신(春信)

입력 | 2015-03-06 03:00:00


춘신(春信) ―유치환(1908∼1967)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 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아파트 등의 공용주택이 주거지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서울에 거닐 만한 공원이 많아진 건 다행한 일이다. 그 많던 마당과 뜰에 살던 초목들과 거기 깃들이던 작은 동물들을 우리는 이제 공원에서 볼 수 있다. 물론 바로 그 꽃, 바로 그 나무, 바로 그 동물들은 아니다. 그들은 갈 데 없이 뿌리 뽑히고 쫓겨나고, 뭉개지고 파묻혔다. 이 시의 살구나무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지금쯤 꽃망울을 맺고 있기를, 그 앞의 창도 여전하기를, 그래서 조만간 ‘꽃등인 양 창 앞에’ 피어오르기를 빌어본다.

제목 그대로 ‘이른 봄에 꽃이 피고 새가 울기 시작하는’ 풍경을 잡아 ‘춘신(春信)’, 봄소식을 전하는 시다. 시인의 방심한 듯 부드러운 시선 속에 날아든 춘신, 살구꽃과 작은 멧새가 뽀야니 떠오르도록 섬세한 필치로 그려졌다.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라니 아침 녘이겠다. 아침 햇살이 하얀 살구꽃의 겹겹 꽃잎을 투과해 나뭇가지에 연분홍 반그림자를 드리웠으리라. 거기 작은 멧새가 날아든다. 꽃 핀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까딱거렸으리라. 그 모습을 보며 시인은 이 작은 것이 ‘적막한 겨우내’ 어찌 견디고 살아냈느뇨, 안쓰럽고 대견하다. ‘앉았다 떠난 그 자리에 여운 남아’, 새가 날아간 뒤의 미세한 ‘한들거림’이 시인의 여린 마음을 건드린다. ‘작은 멧새’ ‘작은 깃’ ‘작은 길’, 각 연에 ‘작은’이 들어 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는 작은 새, 약하고 작은 존재들에 대한 시인의 염려와 사랑이 묻어난다.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그 길을 품어 보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여, 큰마음이여.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