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일 동서문화 발행인·소설가
“모처럼 참석하셨으니, 한 말씀 하시지요.” 이태섭 위원장의 강권에 나는 입을 열었다. “총리, 장관 7명 맡고 2년 뒤 내각제 개헌을 말씀하시는데, 앞의 두 가지는 이루어지겠지만 내각제 개헌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DJ의 내각제 결심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내각제 개헌이 무산되면 국민을 우롱하는 꼴만 됩니다. 국가적 중대 약속이 한낱 기만으로 끝난다면 어찌 바른 정치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DJP 공동 정권은 깨지고 자민련 54석이 그들과 운동권의 공격으로 무참히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후보 단일화 결정은 자민련의 중대한 패착으로 정치 혐오감만 증대시키리라 봅니다.” 김용환 의원이 나를 노려보고 소란이 일었다. 이것이 내 평생 딱 하루 정치에 관여한 일이다.
2년 뒤 총선. JP 낙선 운동이 벌어지고 자민련 54석이 14석으로 줄어드는 파탄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JP에게 정치 황혼이 깃들기 시작한다. 그들 모두 DJ가 내각제 개헌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JP가 김영삼(YS)을 대통령 만들고 민자당에서 쫓겨나던 때를 되새기며 나는 더더욱 정치 혐오가 치밀었다.
한국 정치인들은 왜 탁월한 통찰력으로 국가에 헌신하다 물러나는 드골 처칠 호찌민의 장엄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는가. 카이사르는 현자의 정치 노년은 본 것 많고 아는 것 많고 정치심리 꿰뚫고 세태 변화 법칙을 투시할 수 있어 든든하다고 말했다. JP는 ‘서산에 지는 해’라는 비아냥에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겠노라’ 다짐했지만 아직도 노을빛은 묘연하다. JP는 정치 노년의 지혜를 후학에게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정일 동서문화 발행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