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파헤친 지 94년 만에 3월2일부터 본격 재발굴 실시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먼저 발견된 경주 ‘금관총 금관’(국보 제98호). 국립중앙박물관이 다음 달 2일부터 실시하는 재발굴을 통해 이 금관의 주인공을 밝힐 수 있을지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21년 금관총 발굴은 초기에 고고학자 대신 일반인이 유물 수습에 나서 유물 배치도마저 작성되지 않는 등 부실하게 이뤄졌다. 학계는 재발굴을 통해 아직 규명되지 않은 의문점이 어느 정도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 금관총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짚어본다.
○ 무덤 주인 남자일까 여자일까?
그러나 2013년 7월 중앙박물관이 우연히 금관총 환두대도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글자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무덤의 주인이 남자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신라 금석문 등을 뒤져봐도 금관총이 만들어진 마립간 시대(내물왕∼지증왕)에 여자에게 왕 칭호를 붙인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또 태환이식이 여성용이라는 것도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신라 남성들도 귀고리를 착용한 흔적이 있다”며 “시신을 여자로 보면 이사지왕의 칼이 고분 안에 왜 들어갔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금관총에서 발굴됐던 둥근 고리 큰칼 끝(아래 사진 원 안)에서 2년 전 발견된 이사지왕(尒斯智王·위 사진)이란 글자. 이 때문에 금관총의 주인이 이사지왕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금관총=이사지왕릉?
경주평야에서 숱한 신라 고분이 발견됐지만 피장자를 밝혀주는 명문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금관총 등 일부 신라 고분은 왕의 무덤이 맞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환두대도에서 발견된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주인이 맞다면 금관총이란 이름은 이사지왕릉으로 바꿔야 한다.
반면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주인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윤 교수는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은관 장식에 적힌 ‘夫’ ‘十’자와 같이 금관총의 이사지왕 명문과 함께 발견된 ‘尒’ ‘十’ ‘八’자도 왕의 존칭을 축약해서 쓴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피장자가 이사지왕이라 해도 실제 신라의 왕(마립간)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사지’라는 이름의 신라 왕은 사료에서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금관총의 크기는 마립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 등에 비해 왜소하다. 윤 교수는 “신라 때 왕이라는 명칭은 마립간뿐만 아니라 유력한 왕족도 사용할 수 있었다”며 “법흥왕의 동생으로 왕위계승 서열 2위였던 사부지왕이 갈문왕으로 불린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 금관총에서도 순장 있었나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시대에 순장 풍습이 있었으며 지증왕(437∼514)이 금지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때문에 지증왕 재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금관총에도 순장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목관 서쪽 끝에서 순장자의 유품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팔찌와 옥, 귀걸이 등이 발견됐다. 윤선태 교수는 “신라 적석목곽분의 구조상 재발굴 시 쌓인 돌(적석) 사이에서 다른 유골이 수습된다면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학계에서는 항공사진에서 드러나는 고분들의 분포를 볼 때 금관총이 봉황대의 ‘딸린무덤(陪塚·배총)’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배총은 부부나 형제, 군신 관계의 시신을 근처에 묻는 것을 말한다. 봉황대와 가까운 금관총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것도 근거가 된다. 김재홍 교수는 “만약 이번 재발굴에서 금관총과 봉황대를 잇는 묘도(墓道·묘 사이를 잇는 길)가 나오면 무덤의 주인이 봉황대 피장자의 아내일 수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