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데이비드 실베스터 지음/주은정 옮김·344쪽/1만6000원·디자인하우스
1976년작 ‘자화상을 위한 습작 3점’. 베이컨은 “본래 맥락으로부터 떼어내 인위적 구조 속에서 재구성한, 덜 사실적인 듯 그린 그림이 훨씬 더 실체와 유사해 보인다”고 했다. 사진 출처 francis-bacon.com
표지 하단에 큼직하게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그린 영국 최고의 표현주의 화가’라고 박아놓았다. ‘영국 최고’는 어불성설. 현재까지 결과가 공표된 미술품 경매를 통틀어 베이컨의 1969년작 ‘루치안 프로이트의 습작 3점’이 최고가 기록(1억4240만 달러·2013년 11월 12일)을 보유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갤러리에서 베이컨의 작품을 거듭 돌아보게 되는 건 높은 작품 가격 때문일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내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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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작 ‘십자가 책형을 위한 습작 3점’. 베이컨은 “엄청난 음주와 숙취 속에서 작업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라고 했다.
“있잖아, 사실 런던 테이트에 있는 에릭 홀 초상은 ‘먼지’로 그린 거야. 그 사람 옷에 물감은 한 방울도 쓰지 않았다고. 바닥 먼지를 쓸어 모은 다음 아주 얇게 발라서 얻은 회색이지. 모직 정장 보풀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떠오른 생각이었어. 그런데 미술관은 그 작품 재료가 먼지인 걸 알리길 원하지 않을걸?”
최근 국내 개봉한 영화 ‘미스터 터너’에서 주인공 화가 터너는 캔버스에 이따금 가래침을 뱉으며 물감과 섞어 바른다. 작품 설명 어디에도 ‘캔버스에 수채와 약간의 가래침’이란 문구는 없다. 화가가 그려내려 하는 것, 미술관이 보여주려 하는 것, 관람객이 들여다보려 하는 것의 간극에 대한 상념이 부질없이 돌아간다.
화가와 평론가가 맥주잔을 부딪치며 나눈 대화를 곁에 앉아 고맙게 엿듣는 기분. 답변마다 한구석 망설임도 없다. 확신에 찬 강변이라기보다는 눈앞의 현실과 자신의 작업에 대한 강고한 머뭇거림을 꾸밈없이 토해낸 말 묶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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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은 1975, 1980, 1987년 인터뷰 책을 묶었다. 원제는 ‘Interviews with Francis Bacon’. 베이컨은 번역 제목을 맘에 들어 했을까.
“작품에 대한 오독에 화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러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가능하면 특색 없는 제목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제목이 이미지 안에서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내 작업의 상당 부분을 해석하지 못하는걸요. 나는 작품을 통해 뭔가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뭔가를 ‘하려’ 하는 겁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