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평 중앙대 명예교수
미국에서 돌아온 아들이 부모에게 오랜만에 마음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이 공연이 눈에 띈 모양이다. 이 공연을 보면서 연주도 연주려니와 청중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장 2시간 30분의 연주에서 청중은 시종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음악에 빠져 있었다.
사실 바그너 음악은 만만한 음악이 아니다. 독일 민담에 기초한 이곡은 두툼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끝없이 장대하게 이어지는 선율에 자칫하면 졸기 십상이다. 이러한 음악이 3시간 가까이 청중을 휘어잡기는 여간한 악단의 연주력과 지휘자의 공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날 음악회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와! 우리나라 클래식 수준이 이 정도라니!’ 하는 자부심과 함께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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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던진 말이 마음에 남아 있다.
“지금 우리나라가 ‘국제시장’ 시절인가? 이제 배는 채웠으니 멋도 좀 부려야 하지 않겠나. 정명훈이 서울시향 지휘하는 것만도 자랑스러운 일이지. 그리고 마에스트로에게는 특수성을 인정해 주는 포용력도 가질 만하지 않나.”
그렇다. 정명훈 지휘자 취임 이후 서울시향의 사운드가 몰라보게 달라졌고, 이것은 유료 관객 점유율의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곧 국내총생산(GDP) 3만 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고 인구 1000만의 서울은 변방 도시가 아니다. 이제 우리도 이에 걸맞은 문화생활을 할 만하다고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명훈 지휘자의 최근 2년간의 국내 연주곡 목록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한국 작곡가의 작품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해외 연주를 포함하면 오직 한 곡이 있었는데 진은숙 서울시향 작곡가의 작품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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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번 양보해 연주할 곡이 없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서양 음악을 연습하듯이 외울 정도로 연습을 하고 연주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더 바란다면 작곡가와 토론하며 완성도를 높이는 노력을 한다면 어떨까? 이렇게 작곡가와 연주자가 함께 협업해 왔다면 그래도 연주할 만한 곡이 몇 곡은 나오지 않았을까?
세종대왕은 중국 음악을 쓰자고 졸라대는 고집쟁이 신하 박연에게 일갈했다.
“우리나라 음악이 최고는 아니더라도 중국에 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 중국 음악이라 하더라도 어찌 바른 음악이라 하겠느냐?(我朝之樂 雖未盡善 必無愧於中原. 中原之樂 亦豈得其正乎).”
세종대왕이 살아계셨다면 정명훈 지휘자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 음악이 최고는 아니더라도 서양 음악에 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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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높은 연봉을 주면서 서울시향 지휘를 부탁하는 이유는 한국의 서양 음악 수준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 음악의 수준을 높이는 데도 기여해 달라는 바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새해에는 정명훈이 직접 지휘하는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듣고 싶다. 이러한 기대가 황당한 욕심이 아니길 기대해 본다.
전인평 중앙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