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당선작]<줄거리>박선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물을 좋아했다. 단순히 좋아한 정도가 아니라 하루 종일 욕조에 머물면서 많은 양의 물을 마셔대곤 했다. 걱정이 된 그의 부모님은 그를 병원에 데려갔지만 뾰족한 치료법은 없었다. 그저 크면서 나아질 거라는 의사의 모호한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남자’가 9세 때 ‘남자’의 어머니는 병고 끝에 숨을 거두었다. ‘남자’와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 유언대로 화장한 유골 가루를 호수에 뿌렸다. 유골 가루가 호수로 떨어져 내리는 광경은 ‘남자’에게 극심한 갈증을 불러일으켰고, 견디다 못한 ‘남자’는 호수로 뛰어들었다. 호수 속은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반대로 끝없는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호수 밑바닥은 그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아버지가 호수로 뛰어들어 그를 구해주었다. 아버지에게 호되게 뺨을 얻어맞은 ‘남자’는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했다.
영주와 헤어진 후 몇 달 동안, 남자는 직장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하루 종인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집에 혼자 있던 ‘남자’에게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불이 난 공장에서 아버지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이었다. ‘남자’는 택시를 타고 허겁지겁 공장에 도착했다. 거대한 화염이 공장을 뒤덮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힘 앞에 ‘남자’는 무릎을 꿇었다. 그때 구조대원들이 심각한 화상을 입은 아버지를 구조해 냈다. 아버지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틀 뒤에 숨을 거두었다.
혼자 남은 ‘남자’는 집 밖에는 나가지 않은 채 물을 가득 채운 욕조 안에서 하루 종일 머문다. 물속에서 그는 최초로 지상으로 올라왔던 고대 물고기를 떠올린다. 왜 그 ‘선조물고기’가 시원하고 풍요로운 물속을 떠나 메마른 먼지투성이의 지상으로 올라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선조물고기’가 자손들에게 물려준 삶의 활력, 야망, 의지가 왜 자신에게는 결여되었는지 의문이다. 남자는 자신이 마치 ‘장님물고기’ 같다고 생각한다. 눈과 부레 등 기능이 퇴화하는 쪽으로 역행하며 살아온 ‘장님물고기’와 자신이 비슷하게 여겨진다.
‘남자’는 지상의 더위와 갈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물과 하나가 돼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사람의 몸은 70%가 물이라는데 나머지 30%만 없으면 자신도 물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는 면도칼을 꺼내 자신의 왼쪽 손목을 긋는다. 솟구쳐 흐르는 피와 함께 그의 30%의 불순물도 함께 빠져나간다. 그리고 불순물이 빠져나간 빈자리로 물이 채워지기 시작한다. 물은 점점 차오르더니 마침내 그는 100%의 물이 된다. ‘남자’는 끝없이 깊은 영원한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다.
박선
▼독자 없는 글쓰기라는 모순서 벗어나 세상과 맞닿을 시간▼
[당선소감]희곡
박선 씨
신춘문예에 당선됐다고 해서 당장 작가로서의 길이 열리는 것도 아니고, 아마도 어제와 다름없는 내일이 되겠지만 문학에 대해 그리고 제 자신의 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미 문학적 자산이 넘쳐나고, 과학 기술이 매시간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고, 우주 시대가 열리고, 인공 지능의 실용화를 앞두고 있는 현대에 과연 글을 쓴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됩니다. 결국 문학 스스로가 이 시대를 관통해서 소비될 수 있는 길을 꾸준히 모색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독자 없는 글쓰기라는 자기모순을 넘어서서 세상과 맞닿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77년 서울 출생 △세종대 서양화과 졸업
김철리 씨(왼쪽)와 배삼식 씨.
[심사평]희곡
올해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대체로 수준이 높았다. 희곡이 지녀야 할 기본적 형식을 탄탄히 갖춘 작품이 많았다. 작품의 완성도는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자신이 대면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만큼은 모두 치열하고 진지했다. 귀한 재능, 아까운 작품들이 제법 있었다. 희곡 한 편이 완성되는 과정은 길고 지난하다. 귀한 씨앗들이니 쉽게 버리지 마시기를. 오래 보듬어 잎도 보고 꽃도 보고 열매도 보시길 바란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논의한 작품들은 김하울의 ‘숨쉰 채 발견되다’, 정민지의 ‘아이들’, 박세일의 ‘잉어’, 박선의 ‘물의 기억’ 등이다. ‘숨쉰 채 발견되다’와 ‘잉어’는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좋았다. 강렬한 극적 에너지가 돋보였지만 그만큼이나 인물과 상황 설정에서 작위가 두드러진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아이들’은 무정형의 비사실적 세계를 형상을 통해 구체화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벼리지 못한 듯해 아쉬웠다.
좋은 작품은 우리를 매혹한다. 매혹 앞에서는 군말이 필요없다. 심사위원들에게는 ‘물의 기억’이 그러했다. 이 이야기는 아름답고 견고하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고 그것을 풀어놓은 솜씨 또한 뛰어나다. 문학성과 함께 무대에 대한 이해, 연극적 상상력을 갖추었다. 귀한 재능이며 드문 목소리다. 심사위원들은 반가운 마음으로 이 작품을 올해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김철리 연출가·배삼식 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