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이중섭과 근현대화단 이끈 98세의 재미 원로화가 김병기 전
2012년 작 ‘방랑자’엔 자코메티의 조각상을 닮은 이미지가 수수께끼처럼 숨어있다. 한국의 남과 북, 일본, 미국 새러토가(뉴욕 주)와 로스앤젤레스를 오가며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온 작가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병기 화백
그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나 보다.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 이중섭(1916∼1956)과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함께 쓰고, 정상화(82) 최만린(79) 윤명로(78) 같은 원로 화가들을 길러낸 재미화가 김병기 화백(98)이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시차’ 때문에 잠시 어지러웠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내년 3월 1일까지 과천관에서 개최하는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 올해의 마지막 전시 ‘김병기: 감각의 분할’전이다.
그는 최고령 현역 작가다. 60년 넘게 일궈온 화업을 압축하는 회화 70여 점과 드로잉 30여 점이 걸려 있는 전시장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마운틴의 풍광이 내다보이는 작업실에서 그려낸 신작들도 있다.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내 생긴 가느다란 선과 굵은 붓질이 거칠게 지나간 사이로 앙상한 인체가 숨어있고(‘방랑자’·2012년), 캔버스를 채운 붉은 물감에선 몬드리안과 단청의 색감이 공존한다(‘연대기’·2013년). 구상과 추상,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넘어보려 그는 여전히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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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일인 2일 전시장에서 만난 김 화백은 대뜸 물었다.
“예술에서 이런 절충주의는 타격의 대상입니다. 1+1이 3이나 4 혹은 0이나 9가 돼야 창조적인 제3의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어요.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사고가 있을 뿐이지요.”
몬드리안과 오방색의 빨강을 떠올리게 하는 2013년작 ‘연대기’. 동그라미 5개는 서울 평양 도쿄 뉴욕 로스앤젤레스를 뜻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한국을 떠난 지 49년이 지났네요. 한국에선 서양만 생각했는데, 서양에선 동양만 바라봤어요. 이런 멋진 나라를 두고 어디에 살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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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화백은 “이젠 여생(餘生)이랄 것도 없다”고 했는데, 영상에서 본 작업실 속 그의 붓질은 힘찼다. 후학들에겐 “선배를 따라 해선 제대로 계승을 못한다. 부수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전시장을 돌며 그림을 설명하던 김 화백이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제 작품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과정적일 뿐이지요.”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