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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전문기자의 음식강산]낙지는 힘이 세다

입력 | 2014-12-03 03:00:00



김화성 전문기자

빈 뜰. 빈 텃밭, 빈 둥지, 빈집, 빈 동구, 빈 마을, 빈 숲, 빈 강, 빈 하늘, 그리고 빈손…. 싸락눈이라도 오시려는가. 싸그락! 싸그락! 뒤란 대숲에서 어머니의 새벽 ‘쌀 이는 소리’가 들린다.

빈 들에 선다. 가진 것 모두 내줘 허허로운 벌판. 벌써 12월 문턱이다. 무소유의 달. 침묵과 묵상의 달. 가곡 ‘고향의 노래’가 가슴을 친다.

‘국화꽃 져버린 겨울 뜨락에♬ 창 열면 하얗게 무서리 내리고♪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간다♩ 아∼이제는 한적한 빈 들에 서보라♬ 고향집 눈 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해거름, 먹자골목은 ‘미생(未生)들의 천국’이다. 스치기만 해도 정답고 선한 ‘우멍눈’들. 어찔어찔 부니는 주점의 꽃등불들. 그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탕! 탕! 귓전을 때리는 나무도마 칼질 소리. 그렇다. ‘탕탕이’다.

탕탕이는 산낙지를 탕! 탕! 탕! 칼로 다진 요리다. 메인요리에 앞서 배 속이 굴풋할 때 먹으면 그만이다. 참기름 몇 방울 쳐서 찹쌀인절미처럼 올깃졸깃 새록새록 씹는다. 낙지는 죽어서도 힘이 세다. 동강난 다리빨판이 입천장에 사정없이 들러붙는다. 배곯은 젖먹이처럼 감빨고 흠빨아댄다.

입안 살이 아릿하다. 오톨도톨 울컹물컹 혓바닥에 걸리는 것도 있다. ‘산낙지 먹지 말라’는 정호승 시인의 말을 듣지 않은 탓이다. ‘온몸이 토막토막 난 채로/산낙지가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것은/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바다의 어머니를 보려는 것’인데 쯧! 쯧! 그걸 아귀아귀 먹어대다니!

낙지는 통발로도 잡고, 낚시(주낙)로도 잡는다. 미끼는 보통 칠게를 쓴다. 밤엔 횃불이나 손전등, 서치라이트로 불을 밝혀 잡기도 한다. 이땐 낙지들이 얕은 물에서 민머리를 슬며시 내민 채, 썰물 밀물에 따라 나며든다. 가래 같은 것으로 잽싸게 덮어씌운다.

낙지는 누가 뭐래도 ‘뻘낙지’가 으뜸이다. 초보자는 어림없다. 뻘밭의 낙지숨구멍을 잘 아는 프로나 잡을 수 있다. 구멍에 손을 깊숙이 넣어 잡아낸다. 모래 섞인 단단한 갯벌에선 삽이나 호미로 파서 잡는다.

뻘낙지는 대부분 머리가 작은 데다가 다리가 가늘고 부드럽다. 이른바 세발(細足)낙지다. 갯벌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려고 그렇게 진화한 것이다. 낙지구멍은 미로처럼 수십 갈래로 갈라진다. 뻘낙지는 봄가을에나 잡을 수 있어 요즘이 끝물이다. 낙지는 물이 차가워지면 깊은 곳으로 옮겨간다. 한겨울엔 주낙이나 통발낙지가 주류다. 다리가 굵고 크다. 갯가 사람들은 결코 세발낙지 한 점과 통발낙지 열 점을 바꾸지 않는다.

세발낙지는 뻘밭의 산삼이다. 산 것을 통째로 한입에 먹어야 제맛이다. 우선 나무젓가락 끝을 약간 벌린 뒤, 산낙지 머리통 아래 목 부분을 잽싸게 끼워 넣는다. 그런 다음 낙지의 다리 8개를 한두 번 손으로 훑어 내린 뒤, 돌돌 감아 참기름장에 찍어 먹는다. 머리통부터 날름 입에 넣고 우걱우걱 천천히 씹는다. 자칫 다리부터 먹다간 숨이 막혀 큰일 난다. 낙지다리는 새끼 꼬듯 지그재그로 감거나, 어긋버긋하게 감아야 풀리지 않는다.

무안의 낙지호롱도 맛있다. 낙지다리를 볏짚이나 나무젓가락에 돌돌 감고, 매콤새콤한 양념장을 발라 굽는다. 낙지초무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막걸리 식초로 무쳐야 시큼새큼한 맛이 솔솔 살아난다. 낙지구이, 낙지산적, 낙지전골, 낙지볶음, 연포탕, 철판낙지, 태안의 박속밀국낙지탕…. 낙지요리는 양념을 적게 해야 담백하고 개운한 맛이 살아난다.

전남 목포의 독천식당(061-242-6528), 신안뻘낙지식당(061-243-8181)과 무안낙지골목의 내고향뻘낙지(061-453-3828) 무안군청 옆 하남회관(061-453-5805), 서울 광화문 신안촌(02-738-9960)이 이름났다.

음력 시월 열이틀 밤. 겨울 밤하늘은 봄여름 가을밤보다 훨씬 밝다. 일등성 별들의 반 이상이 얼굴을 내민다. 남쪽 오리온자리엔 일등성이 2개나 초롱초롱하고, 황소자리 붉은 별(오른쪽 눈)은 잉걸불처럼 발갛다. 큰개자리 코끝의 시리우스(천랑성·天狼星)는 일등성 별의 10배나 또렷하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의 늑대별.

누가 밤하늘에 금싸라기를 뿌려놓았는가. 문득 아등바등 사는 게 우습고 덧없다. ‘어디다 던지던 돌인가. 누구를 맞히려던 돌인가. 사랑한 사람도, 미워한 사람도 없는데…’ 격자무늬 장지문 너머 모과빛 불빛이 그윽하다. 또 한생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