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럴당 71달러선까지 하락 엔저-세계경제 위축 심해… ‘유가하락=경기호황’ 공식 깨져
휘발유값 L당 1500원대로 내렸지만… 국제 유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수도권에서도 휘발유를 L당 1500원대에 파는 주유소가 등장했다. 28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의 한 셀프주유소에서 휘발유 가격이 L당 1597원을 가리키고 있다. 유가 하락은 통상 경기 활성화로 이어지지만 최근 한국 경제에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고양=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유가 하락 소식이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유가 하락→원유 도입비 감소→생산단가 하락, 물가 안정→투자와 소비 증가→경제 활성화’로 이어진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 상식이 더는 통하지 않고 있다.
이달 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을 3.5%로 전망했다. 5월 예상치보다 0.5%포인트 낮췄다. 통계청에 따르면 10월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73.5%로 2009년 5월(73.4%)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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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재료가 싸다 한들 팔 데가 없다
유가 하락이 한국 경제에서 도약의 모멘텀이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글로벌 경기 침체다. 미국발(發) 셰일가스 열풍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 생산량을 늘리면서 원유 공급이 증가했지만 중국과 유로존의 석유화학제품 수요가 받쳐주지 않고 있다.
중국의 3분기(7∼9월) 경제성장률은 7.3%로 2009년 1분기(6.6%) 이후 최저치였다.
▼ 정유-유화업계, 재고가치 떨어져 초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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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배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세계 경기가 워낙 위축돼 있어 유가 하락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경영원이 기업체 최고경영자(CEO)와 임원 12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에서 “내년에 투자를 늘리겠다”고 답한 이들은 22.4%에 그쳤다.
○ 환율의 부정적 효과가 더 커
1980년대엔 저유가, 저원화가치(고환율), 저금리 등 ‘3저’가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1990년대 말 한국이 외환위기에서 비교적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던 요인은 평균 원유 도입 단가가 배럴당 20달러대에서 13달러대로 하락한 것도 있지만 고환율의 수혜도 컸다. 낮은 유가와 함께 환율이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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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 조선업계는 저유가가 독(毒)
유가가 하락세를 타면서 정유와 석유화학업계는 직접적인 타격을 입고 있다. 지난해 국내 수출에서 석유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9.4%에 달했다. 정유업체가 중동에서 원유를 한국으로 실어오는 데는 40∼45일이 걸린다. 석유화학제품으로 만들어 판매할 때까지는 총 90일 정도의 시차가 발생한다. 그 사이 원유 가격이 하락하면 재고 가치가 떨어지고 석유화학제품 가격이 동반 하락하면서 정제 마진이 줄어들게 된다. 국내 정유업계는 정유 부문에서 올해 1조 원에 이르는 영업손실을 낼 것으로 예상된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해외 지사를 통해 원유 가격을 모니터링하고 재고 관리, 원재료 다변화를 통해 방어하겠다는 뻔한 얘기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게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조선업계도 마찬가지다. 유가가 하락하면 오일메이저들의 유전 개발 투자가 위축돼 해양플랜트 발주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국내 조선 1위 업체 현대중공업은 올해 들어 10월까지 전체 수주액 167억 달러(약 18조4869억 원) 중 해양플랜트 비중이 21.0%나 됐다.
변양규 한국경제연구원 거시정책연구실장은 “제조업에서 중국에 추격당하는 가운데 저유가 덕분에 그나마 한국 경제가 버티고 있지만 본격적인 경기 회복까지 기대할 상황은 아니다”라며 “고부가가치 산업을 키워 차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유현 yhkang@donga.com·박희창·이상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