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식 정치부 차장
1938년 12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유대인 난민위원회는 ‘어린이 이송(Kindertransport)’ 작전으로 유대인 어린이 1만 명을 독일 폴란드 등지에서 탈출시켜 영국으로 보냈다. 약 9000명은 부모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 부모들은 5000명을 미국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상황은 달랐지만 20세기 초반의 잇단 전쟁과 내전 소용돌이에서 부모들의 심정은 하나였던 것 같다. 보다 나은 미래를 안겨 주겠다는 심정에서 자녀들과의 생이별을 결정한 것.
이때 만들어진 ‘페드로판 작전’으로 쿠바 어린이 1만4048명이 1960년 12월 26일부터 1962년 10월 23일까지 미국 마이애미로 향했다. ‘피터 팬’의 스페인어에 해당하는 페드로판으로 명명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페드로판의 정착을 지원한 브라이언 월시 신부는 아이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훨훨 날 수 있게 금빛 가루를 뿌려준 요정 팅커벨 같은 역할을 했다.
2010년 페드로판 50주년 행사에서 ‘라 말레타(La Maleta·트렁크)’라는 설치 예술작업을 벌인 마노는 1962년 4월 17일 쿠바를 떠났던 페드로판 출신. 그의 부친 펠리신도 마누엘 씨는 12세이던 1937년 스페인 내전을 피해 단신의 몸으로 쿠바로 왔던 인물이었다. 그의 가족사에는 서구 전쟁과 내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듯했다.
언제나 삶은 치열하다. 모든 일이 소설처럼 풀리지도 않는다. 전쟁과 내전에 치여 바깥으로 내몰린 아이들은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다. 마노를 비롯한 페드로판이 마주친 것은 ‘No blacks, No dogs, No Cubans(흑인, 개, 쿠바인 출입금지)’라는 차별의 벽이었다. 그 벽을 넘기 위해 페드로판은 어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피터 팬’의 네버랜드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나라였지만 페드로판의 세상은 그와는 달랐다.
동아일보의 연중기획인 ‘통일코리아 프로젝트 2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는 지난주 독일 미국 이스라엘의 통합 교육 현장을 소개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이들이 겪은 차별의 벽도 새삼 실감했다. 한국 사회를 찾아온 탈북 청소년들의 처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먼 훗날 지금의 우리 사회를 되돌아본다면 탈북자 출신을 따지는 것으로 차별의 벽을 안겨주는 것처럼 ‘아이고 의미 없다’라는 평가를 받을 게 있을까 싶다. 탈북 청소년의 ‘머릿속 장벽’을 없애는 것은 커다란 통합의 출발점일 것이다. 당장 주변의 탈북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부터 건네는 것이 어떨까.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