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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한일관계 ‘조선통신사’에 길을 묻다

입력 | 2014-09-13 03:00:00

가깝고도 먼 49.5km




지난달 3일 일본 쓰시마에서 2년 만에 다시 열린 조선통신사 국서 교환식 재현 행사. 쓰시마=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부산에서 49.5km, 맑은 날 부산 태종대에 오르면 맨눈으로 일본 쓰시마가 보인다. ‘국경의 섬’으로 불리는 곳이다. 일요일인 지난달 3일을 전후해 쓰시마 시청 소재지인 이즈하라(嚴原) 항 일대 호텔과 민박집의 방이 동났다.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福岡) 공항과 쓰시마를 오가는 항공편도 일찌감치 만석이었다. 2년 만에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현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일본 각지는 물론이고 부산에서 페리 편으로 들어온 한국 관광객들로 섬 전체가 들썩였다.

쓰시마는 1980년 이즈하라 항 축제 때 처음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했다. 조선통신사 연구의 선구자인 재일교포 신기수 선생이 쓰시마 역사자료관에서 상영한 ‘에도 시대의 조선통신사’라는 영화 한 편이 계기였다. 쓰시마는 1988년 축제 이름을 ‘아리랑축제’로 바꿨다. 2002년부터는 부산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를 초청해 함께 행렬을 재현했다. 옛날 정사와 부사, 종사관의 후손들도 초청됐다. 한일 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선조들의 영광을 되살리려 한 것이다.

그랬던 조선통신사 재현 행렬이 지난해 끊겼다. 고려 후기의 보살좌상과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입상 등 불상 2점이 쓰시마에서 반출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조선통신사 행렬을 보지 못한 지난해 쓰시마 섬 전체가 우울증에 빠졌다. 쓰시마의 조선통신사 행렬 진흥회장을 맡고 있는 이나다 미쓰루(稻田充) 씨는 “많이 허전했다”고 말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쓰시마는 올해 다시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기로 했다.

지금도 앙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축제 이름에서 ‘아리랑’은 지워졌다. ‘한국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내건 선술집도 보였다. 한 20대 남자는 “한국 관광객이 늘면서 일부는 혜택을 보겠지만 섬 주민 대부분은 성가시기만 하다”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환대와 불만은 200년 전에도 교차했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일본을 오간 조선통신사는 그런 상황에서 교류를 이어갔다. 통신사(通信使)에는 ‘믿음을 소통한다’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일 양국은 200여 년간 선린 우호의 외교관계를 이어갔다. 당시 일본에서는 원조 ‘한류 붐’이 일었다. 한일 관계가 어느 때보다 악화되고 있는 지금 조선통신사의 의의가 다시 평가받고 있다.  


▼ 도쿠가와의 정성… 1년 稅수입 넘는 100만냥 들여 접대 ▼

적 탐지로 시작해 교류로… 아베 지역구서 행렬 재현


일본 교토 고려미술관이 소장한 조선통신사 행렬도. 쓰시마 번주가 무사, 짐꾼들과 함께 에도(현재 도쿄)를 오가는 조선통신사를 수행했다. 2000여 명에 이르는 조선통신사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일본 각지에서 인파가 몰려들었다. 동아일보DB

지난달 3일 쓰시마에서 예정됐던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은 불발됐다. 마침 북상한 태풍 나크리 탓이었다.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의 표정엔 아쉬움이 컸다. 축제에 맞춰 일한 교류 사진전을 열고 있던 니이 다카오(仁位孝雄) 나가사키(長崎) 시 미술진흥회 이사는 “2년간 기다렸는데 태풍이 마음을 몰라준다”며 탄식했다.

그 대신 쓰시마 교류센터 내 공연장에서 국서 교환식이 재현됐다. 쓰시마 번주 역할의 호리에 마사타케(堀江政武) 쓰시마 시의회 의장은 국서에서 “지난해 한국에서 18만 명 이상 방문하는 등 쓰시마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국제 교류의 최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조선통신사 정사(正使) 역을 맡은 권오성 부산시의회 행정문화위원장은 “지난해 행렬 재현이 중단됐지만 서로의 신뢰를 통해 (행사를) 재개해 기쁘다”고 화답했다.

1764년 제11회 통신사에 부사로 나섰던 이인배의 8대손으로 이번 행사에서 역시 부사 역을 맡은 이상구 씨(72)는 감격에 젖었다. 그는 “소통과 신뢰의 상징이던 조선통신사의 정신을 되살린다면 두 나라 간 문제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조선의 실리주의 외교

쓰시마와 조선통신사는 밀접한 관계였다.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연 29만 명의 군사를 보내 조선을 초토화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불리는 침략전쟁이었다. 도요토미의 죽음으로 일본군이 물러난 1년 뒤인 1599년 쓰시마 번이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도요토미의 뒤를 이어 일본 천하를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화평을 맺고 싶어한다”는 전갈이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일본이 정말 화평을 맺으려는 건지, 다시 침략하려는 트집 잡기용인지 꿍꿍이속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일단 탐적사(探賊使)를 파견해 일본의 정세를 정찰하기로 했다. 이때 파견한 사신이 사명대사 유정이다. 유정은 승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운 바 있다. 왜군의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4차례 협상한 경험도 있었다.

1604년 유정은 쓰시마로 향했다. 쓰시마 번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이를 국교 재개의 좋은 기회로 여겼다. 유정을 설득해 도쿠가와가 있는 교토(京都)까지 데리고 갔다.

소가 조선과의 국교 재개에 적극적이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쓰시마는 면적의 88%가 표고 500∼650m의 산지로 농작물을 경작할 땅이 거의 없는 섬이다. 자급자족이 어려웠던 탓에 한반도를 1000년 이상 괴롭혀 온 왜구의 소굴이기도 했다. 조선은 소에게 왜구 단속을 요청하는 대신 독점 무역권을 줬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국교가 단절되자 섬은 생사의 기로에 섰다. 조선과 국교 재개만이 살 길이었다.

도쿠가와는 유정을 직접 만나 “나는 조선 출병에 관계하지 않았다. 조선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다. 나는 조선과 화평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가운데 일부인 1400명도 유정의 귀국길에 돌려보냈다. 한양으로 돌아온 유정은 일본의 재침 위험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래도 조선 왕실은 일본과의 국교 회복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 사무친 원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한반도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세력을 넓히면서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남과 북, 아래위로 적을 두기에는 부담이 컸다. 조선은 세 번째 통신사가 파견됐던 1636년 병자호란을 당했다.

조선은 조건을 달아 화평에 응하기로 했다. 도쿠가와가 먼저 화평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낼 것이며 임진왜란 때 조선 왕릉을 파헤친 범인을 잡아 보내라고 했다. 몇 개월 후 도쿠가와의 인장이 찍힌 국서가 쓰시마 번을 통해 조선에 전달됐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내용이 남아 있다. ‘우리가 전대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것은 지난해 유정에게 말한 대로다.’

하지만 국서는 쓰시마 번이 위조한 것이었다. 서체도, 연호도 과거 일본의 국서와 달랐다. 잡아 보낸 범인도 쓰시마 번의 잡범이었다. 선조는 이를 알아챘다. 하지만 눈감고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기로 했다. 실리를 취하기로 한 것이다. 1607년 파견된 1차 사절단의 이름은 ‘회답 겸 쇄환사’였다. 일본이 보낸 국서에 답하고 조선인 포로를 찾아온다는 의미다.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에는 선조가 1607년 2대 쇼군(막부 우두머리) 히데타다(秀忠)에게 보낸 국서가 전시돼 있다. 쓰시마 번이 보낸 가짜 국서에 대한 조선 임금의 회답으로 이 역시 그대로 전달할 수 없어 쓰시마 번이 다시 위조한 것이다. 전시관에는 쓰시마 번이 위조한 옥새도 함께 전시돼 있다.



도쿠가와 막부의 지극정성

12차례 파견된 통신사 일행은 정사, 부사, 종사관 등 삼사(三使) 이하 400∼500명으로 구성됐다. 행렬은 쓰시마와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오사카(大阪)까지는 뱃길로, 오사카에서 에도(지금의 도쿄)까지는 육로로 이동했다. 평균 10개월∼1년이 소요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쇄환사로 파견된 첫 통신사는 여우길을 정사로 하는 467명이었다. 이들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에게 귀국하자는 포고문을 보이며 길을 걸었다. 하지만 1607년, 1617년, 1624년 등 3차례에 걸쳐 파견된 쇄환사가 데려온 조선인은 약 2000명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이 포로를 감춘 데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이미 자리를 잡아 돌아오기 어려웠던 조선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쇄환사는 이후 네 번째 방일 때인 1636년부터 ‘조선통신사’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1811년까지 막부의 경사나 새로운 쇼군이 자리를 물려받을 때마다 일본을 오가며 양국 우호의 가교가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자 문인 서예가 화가 등이 다수 포함됐다. ‘칼’을 숭상하는 일본을 교화해 이들의 마음에서 전쟁과 침략의 유전자를 다독이기 위한 포석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쓰시마 번이 파견한 환영선의 안내로 쓰시마 섬에 도착한 뒤 번주의 경호 아래 에도까지 왕래했다. 일본인 수행인력을 합하면 2000명이 넘어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대규모 행렬이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지역마다 엄명을 내려 국가 총력 체제로 이들을 대접했다. 조선통신사를 통해 막부의 위신과 권위를 높이려 했던 것이다. 다이묘(大名·번주)들의 재정을 소진시켜 힘을 빼려는 노림수도 있었다.

통신사가 지나는 각지의 다이묘는 경쟁을 벌이듯 통신사를 접대했다. 객사는 최고로 경치가 좋은 곳을 골랐다. 당시 일본은 불교를 국교로 삼아 육류 섭취를 금기시했다. 하지만 통신사에 돼지고기 등을 대접하기 위해 고기를 들이는 별도의 출입문을 숙소에 만들 정도였다.

통신사 접대 경비로 쓰인 돈은 100만 냥에 이르렀다. 마쓰바라 가즈유키(松原一征) 조선통신사 연지(緣地)연락협의회 이사장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500억 엔(약 4850억 원)에 이르는 금액이다”라고 말했다. 1709년 에도 막부의 세입이 약 76만∼77만 냥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시모노세키에 재현된 조선통신사 행렬

쓰시마에서 불발된 행렬은 약 3주 뒤인 지난달 23일 일본 본토 서쪽 끝의 항구도시인 시모노세키 시 ‘바칸 마쓰리(축제)’에서 재현됐다. 시모노세키는 조선통신사가 바닷길로 쓰시마를 거쳐 일본 본토로 들어갈 때 들르는 첫 기착지였다. 시모노세키와 기타큐슈(北九州) 사이로 난 폭 1.5km의 간몬 해협을 통과하면 곧바로 일본의 내해(內海)로 불리는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로 진입하게 된다. 일본의 최대 상업도시였던 오사카와 고베(神戶)는 모두 세토나이카이에 붙어 있다.

해안도로에 시모노세키 시와 부산문화진흥재단이 재현한 조선통신사 행렬의 나팔과 꽹과리, 장구 소리가 울려 퍼지자 도로변 상가가 들썩였다. 시민들은 상가 건물 2층 난간까지 몰려나와 행렬을 지켜보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해동 부산시의회 의장이 분장한 정사는 가마 위에서 긴 수염을 휘날리며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통신사 행렬이 시내 중심지로 진입하자 시민들의 반응은 더 폭발적이 됐다. “스고이(멋지다)”라는 탄성이 쏟아졌고 공연하느라 땀을 쏟아내는 사물놀이패에 부채를 부쳐주는 시민들도 있었다.

한 할머니는 부채춤을 추는 무용단에 다가가 일본어로 뭔가 말을 걸고 있었다. 알고 보니 76세 재일교포 2세였다. 이 할머니는 “어머니가 통신사 일행처럼 늘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이날 행렬의 출발 지점은 옛날 조선통신사가 상륙했던 항구 옆 광장이었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이는 항구 옆에는 ‘한일의원연맹 회장 김종필’의 휘호가 새겨진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가 서 있다.

이곳에서 만난 민단 야마구치(山口) 현 지방본부 이만우 부단장은 “부산문화진흥재단이 행렬을 재현하기 전에도 3, 4년에 한 번씩 시청 사람들과 교포들이 축제 때 행렬을 재현하곤 했었다”며 “일본 본섬에서는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만큼 한국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고 말했다.

행렬이 끝나자 시내 중심 광장에서 국서 교환식이 열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도 이날 행사장을 찾았다.  




▼ “200년간 한일 평화, 信을 지키려는 노력 있어 가능” ▼

300년 전의 한류… 우정 뒤엔 팽팽한 긴장



일본 시모노세키 거리에서 재현된 조선통신사 행렬. 정사로 분장하고 가마에 탄 이해동 부산시의회 의장이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시민들은 ‘멋지다’는 탄성을 쏟아내며 환영했다(위쪽 사진). 시내 광장에서 열린 국서 교환식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부인인 아키에 여사가 직접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아래쪽 사진). 시모노세키는 아베 총리의 지역구다. 시모노세키=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아키에 여사는 이날 저녁 환영행사에서 “정치적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민간 간에는 우호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김치도 만들고 한국말도 배우고 친한 한국인도 많다. 양국이 우호를 빨리 되찾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시모노세키는 아베 총리의 지역구(야마구치 4구)다.



한류의 원조를 보다

시모노세키에서 재현 행렬에 쏟아진 ‘스고이’ 세례의 원조는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 쇄국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일본 학자와 문인들은 조선통신사와의 교류를 ‘일생의 영광’으로 알았다. 사절단이 묵는 객사에는 일본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시문이나 서화를 의뢰했다.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확인하고자 필담을 나누려는 학자들도 줄을 이었다. 조선 사신이 쓴 글씨나 그림을 지니면 액운이 달아난다는 믿음이 생겨나기도 했다.

“사관(使館)에 연일 심상한 시인들의 방문이 잇달아 시를 부르고 화답하기와 필담으로 쉴 새가 없어 고통을 겪었다.”

1719년 제9회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갔던 신유한이 여행기 ‘해유록(海遊錄)’에 남긴 기록이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길은 구경하러 온 인파로 산과 바다를 이뤘다. 조선 영조 때 문인 김인겸은 1764년 통신사 행렬이 에도로 입성할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에도로 향하는 30리 길이 빈틈없이 인파로 이어져 있으니 대체로 헤아려 보면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인기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오카야마(岡山) 현 우시마도(牛窓) 정에서는 통신사 행렬의 소동들이 추던 춤을 본뜬 ‘가라코 오도리’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통신사를 모티브로 한 인형도 일본 곳곳에서 만들어졌다.

조선통신사 행렬에는 의원들도 동행해 동의보감 등 당시 첨단 의학을 전수했다. 쓰시마 시가 발간한 조선통신사 자료집에는 “조선통신사의 방일로 물자뿐만 아니라 예술 학문 등의 교류도 왕성하게 이뤄져 현재 일본 문화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통신사 일행이 일방적으로 주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미개하다고 여겼던 일본의 경제적 번성을 본 통신사들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1624년 부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강홍중은 “시장에는 물건들이 쌓여 있고 여염집에는 쌀이 넘쳐난다. 백성의 부유함과 물자의 풍부함이 우리나라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통신사가 일본에서 본 수차 등 앞선 문물은 조선후기 실학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교차하는 우정과 미움


통신사 파견이 거듭되면서 한일 간에는 깊은 우정이 싹텄다. 신유한과 교류했던 쓰시마 번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는 조선과의 풍부한 교류 경험을 바탕으로 펴낸 ‘고린테이세이(交隣提醒)’라는 책에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한 마음으로 사귀는 성신(誠信)을 바탕으로 조선과 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도 시대 일본 근린외교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부산 초량 왜관에 3년간 유학했고 일본 최초의 조선어 학습 교재인 고린슈치(交隣須知)를 펴냈다.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 앞뜰에는 지금도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이라고 새겨진 아메노모리 호슈 현창비가 서 있다. 이에 호응하듯 자료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고려문과 조선통신사비가 세워져 있다.

통신사가 다녀가는 사이 양국 민족감정이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대립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교토 다이부쓰지(大佛寺) 서쪽에는 조선인 귀무덤(耳塚)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베어낸 조선인의 귀와 코를 항아리에 담아 묻은 것이다. 최소 10만 명 이상의 귀와 코가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719년 통신사가 교토를 방문했을 때 쓰시마 번주는 막부의 명령이라며 다이부쓰지 연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인근에 있는 귀무덤을 상기시키며 조선 사신들을 은근히 겁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정사 홍치중은 이 절이 도요토미의 원당(願堂·명복을 빌던 법당)이어서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외교 파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교토의 책임자가 꾀를 냈다. ‘일본연대기(日本年代記)’라는 가짜 책을 보여주며 이 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건한 절로 도요토미의 원당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홍치중은 결국 부사, 제술관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지만 종사관 이명언은 끝까지 참석하지 않았다. 한일 우정의 한편에는 민족의 한(恨)과 자존심이 늘 팽팽한 긴장 속에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이번 시모노세키 축제의 뒷마당에도 아픈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조선통신사가 상륙한 옛 항구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언덕 위의 ‘일청강화기념관’.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 지배권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당시 고급 음식점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끌려온 강제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처음 도착했던 곳도 이곳 시모노세키였다.

앞서 쓰시마에서도 역사의 아픔이 느껴졌다. 조선통신사 축제가 펼쳐지는 이즈하라 항 언덕배기에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슈센지(修善寺)라는 절이 있었다. 한말 일제에 항거하다 쓰시마에 유배돼 숨진 최익현의 유해는 이 절에서 장례를 치른 뒤 부산으로 옮겨졌다. 지금 슈센지의 순국비는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세운 것이다. 순국비 앞에는 조화와 물 한 컵이 바쳐져 있었다. 관리인은 “후손들이 매년 한 번씩은 이곳을 찾아 꽃을 바치고 간다”고 전했다.



끊어진 통신, 되풀이된 침략


1800년대 들어 가뭄과 기근으로 재정난과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자 도쿠가와 막부는 우두머리가 바뀌었는데도 조선통신사 파견 요청을 미루다 1811년 쓰시마에서 12번째 조선통신사를 맞았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57년 뒤 일본에서는 근대화 혁명이라는 메이지(明治)유신이 일어나 도쿠가와 막부는 권좌에서 쫓겨났다. 메이지 정부는 1876년 조선 침탈의 신호탄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통신사가 아니라 수신사(修信使) 파견을 요청한다. 조선을 새로운 국제질서에 편입시켜 일본의 한반도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전략이었다. 수신사 일행은 통신사가 이용하던 목선 대신 일본이 제공한 증기기관선을 이용했고 일본 방문 비용 일체는 과거와 달리 조선 조정이 부담했다. 조선의 우수한 문화를 전수하던 통신사와 달리 수신사는 선진 문화 수용자였다. 고종은 나름대로 1882년까지 4차례 파견된 수신사를 통해 나라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믿음의 소통이 끊어진 시점에서 양국 교류사에 불행이 찾아온 것이다.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앞둔 최근에도 양국 관계는 오히려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일본의 조선통신사 연구 권위자인 교토조형예술대 나카오 히로시(仲尾宏) 교수는 “전쟁을 하지 말자는 양국 지도자의 강한 결의가 200년간의 평화를 가져왔다”며 “지금 이 시대야말로 당시 외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철 부산대 사학과 교수는 “통신사의 시대가 평화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이나 일본 모두 상대를 깔보거나 적으로 여기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그런 불안정 속에서도 평화를 지속한 것은 ‘믿음의 교류’라는 이상을 유지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접국 간의 마찰을 노골적인 대립으로 만들지 않으려 한 외교적 노력이 중단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쓰시마·시모노세키=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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