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세종대 이사장
아베 총리가 이야기하는 ‘전후체제의 탈피’라든가 ‘자학 사관에서 벗어나자’라고 하는 것은 사실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것이다. 뒤집어 읽으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패배한 일본이 뉘우치기보다는 오히려 분개하고 있다는 표시라는 거다.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은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샌프란시스코 협정과 ‘도쿄 전범재판’의 결과를 부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1930년대 군국주의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후 70년간 일본은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미국과 인류 보편적 가치관을 공유해왔고 국제평화에도 많은 기여를 해 왔기 때문이다. 과반의 일본 국민은 아베 총리의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도 미국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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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미국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강대국으로서 중국이나 한국과 같이 일본의 지배를 경험하지 않았다. 우리와는 피부로 느끼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전후 일본이 스스로 군국주의를 청산하지 못하게 된 책임은 사실 미국에도 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될 당시에는 이미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미국은 스탈린의 국제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하여 한국전에 참전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수행에 일본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일본의 공산화 우려도 컸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 징벌보다는 조속한 안정화에 주력하였다. 이는 일본의 역사적 행운이었다고 본다.
둘째로 동맹국으로서의 일본의 역할과 중요성은 더욱더 강조되고 있다. 이는 중국의 부상 때문이다. 미국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정책 또는 ‘재균형(Rebalancing)’ 정책은 부상하는 중국을 의식해 아시아에서 기존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 틀림없다.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은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아시아의 비중이 비약적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셋째로 미국의 동북아 정책은 미일 및 한미 동맹관계에 기초한 강력한 군사적 억지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주일 미군기지는 아·태 지역에서 미국이 군사력을 투사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구성 요소이다. 주한 미군의 작전 능력도 주일 미군이 유사시 후방 지원을 얼마나 원활히 하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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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최근 과거에는 없었던 성의를 보이면서 위안부 자료 등 항일 관련 역사문제에 한국과 공조하고 있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된다. 고구려를 자신의 역사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더욱 심각한 역사왜곡이기 때문이다. 표류하고 있는 한일 관계 때문에 7월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한국 방문이 미국과 일본에서는 실제보다 확대 해석되고 있다. 한국이 중국의 궤도에 끌려들어가고 있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세미나에 참석한 미국 전문가들은 한중 관계의 발전을 환영한다고 했지만, 이것이 진정한 속내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미국은 한국이 그동안 TPP 협상에 참가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것을 두고, 한국이 중국을 의식한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미국이 일본을 끌어들여 TPP를 적극 추진한 것은 경제적 측면보다는 정치 안보적 고려가 우선시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중 관계의 발전과 기존의 한미 동맹관계를 잘 조화시키기 위해서도 한일 관계의 개선은 시급해 보인다. 한일 관계의 악화 원인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미국 전문가들은 모두 한일 정상 간의 회동이 조만간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이 일본 편을 들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이번 워싱턴 방문의 성과라면 성과였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세종대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