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강릉 제왕산을 오르면서 왜 나는 이렇게 힘든 산을 홀로 오르는가를 자문자답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어떤 일이든 어떤 행위든 할 때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목적이 뚜렷할수록 실행을 함에 고통이 있고 힘이 들어도 의욕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나는 항시 산에 오르면 큰소리로 외치는 삼창이 있다. 행복하다, 할 수 있다, 건강하다를 3회씩 외치고 나면 최면이 걸려 힘든 줄도 모른다. 지금 삼복더위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힘들게 산을 오르는 건 확실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산에 자주 가자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고 둘째, 공해 없는 시원한 공기를 맘껏 마실 수 있다는 것이고 셋째, 골짜기의 낙수 소리와 매미의 공연에 매료된다는 것이고 넷째, 나의 체력을 재확인할 수 있어서다. 산에 오면 건강할 수 있다는 기대도 크다.
산행을 하다 보면 흙이 파인 등산로에 이름모를 나무의 뿌리가 얽혀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겉으로는 나무의 모습이 그림같이 멋있지만 이를 만들어 준 유공자는 숨어 보이지 않는 뿌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숲 속에는 나무 바위만 있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새 짐승 벌레 등이 함께 서식하면서 새는 나무에 피해를 주는 벌레를 잡아먹고, 그 벌레는 새의 먹이가 되고 버섯과 공생하며 늙어 쓰러진 나무를 빨리 부식하게 하여 숲을 깨끗하게 정리해 준다는 것도 말없는 스승인 자연에게서 기역 니은부터 배운다.
인적이 드문 높은 산의 정상에 오르면 앙상한 고사목이 많이 보인다. 육질은 바람에 파여 속뼈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처음엔 멋있구나 하다가도 몇 초만 흐르고 나면 저 나무가 저렇게 될 정도라면 오랜 세월 속에 숱한 눈 얼음 폭풍우에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땐 눈물이 날 정도로 연민의 정까지 들 때도 있다.
제왕산은 대관령 맥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나오는, 마치 밥그릇 엎어 놓은 듯한 형태의 산이다. 높이는 841m로 접근하면 조용하던 숲이 돌연 얼음 같은 찬바람이 몰아치며 얼굴을 얼린다.
이 산은 고려 32대 우왕이 잠시 피난을 했다 하여 임금 제(帝)를 써서 제왕산이라 했다. 깨진 기왓장이 옛 모습을 회상케 하고 산 아래는 상제민원계곡이란 아름다운 골짝이 그림같이 누워 있어 어느 산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절경이다.
나만의 유별난 삼창을 외쳤으니 잡다한 인간사를 살짝 잊고, 자연과 벗한 이 하루가 후일 추억에 남을 인생이 아니겠는가. 산이여 안녕, 임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이렇게 행복하다오.
이건원 시인 등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