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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놀던 물로 돌아온 호랑이 선생님

입력 | 2014-07-03 03:00:00


《 나름대로 ‘세상’을 한번 바꿔보려고 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를 키웠기에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믿어주는 이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히 무시했다. 수영계가 나쁜 매너리즘에 빠져들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다시 뛰쳐나왔다. 처음에 그랬듯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라도 다시 세계를 제패할 수영 유망주를 키우겠다는 각오로 맨 밑바닥으로 내려왔다. ‘마린보이’ 박태환(25·인천시청)을 키운 노민상 전 한국 수영대표팀 감독(58). 그는 3월부터 서울올림픽수영장에서 초등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약 30명의 선수를 지도하고 있다. 엘리트 선수들이 아니다. 수영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아이들이다. 2009년부터 ‘노민상 꿈나무 교실’로 문을 열어 틈날 때마다 가르쳤는데 이젠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지도하고 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대학교수란 간판까지 포기했다. 》

노민상 전 한국 수영대표팀 감독(왼쪽)이 ‘제2의 박태환’을 꿈꾸는 제자에게 수영 동작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서울올림픽수영장에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강단을 벗어나 다시 현장에 뛰어든 그의 눈매에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느껴진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대학 문턱에도 가 보지 못한 노 감독은 2011년 3월부터 중원대 스포츠과학과 교수로 활동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수영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한 박태환을 키웠기 때문이다. 중원대는 박태환을 발굴하고 대표팀 감독으로서도 잘 조련해 금메달을 만들어낸 지도력을 인정했다. 그를 실기 지도 교수로 영입했다. ‘노 교수’의 야망은 컸다. 수영지도학과를 만들어 좋은 지도자들을 사회에 내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노 감독은 딱 3년 만에 사표를 냈다.

“수영지도학과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한국 수영을 밑바닥부터 바꾸고 싶은 내 욕심이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 당초 나를 믿어주는 분이 갑자기 학교를 떠나자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도 없어졌다.”

○ 생계 때문에 수영 그만둬야 했지만…

노 감독은 밟을수록 일어나는 ‘잡초’처럼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 ‘한강의 물개’로 불렸던 노 감독은 서울 오산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엘리트 수영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자유형 전문이었다. 하지만 ‘한강에서 놀기나 하면 되지 무슨 수영장이냐’란 어머니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먹고살기 힘든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노 감독이 7세 때 남편을 여의고 혼자서 생선 등을 팔아 3남매를 먹여 살리던 어머니는 힘든 수영을 하려는 막내가 안돼 보였다. 그래서 늘 “수영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노 감독에게는 물속에선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허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오산고 2학년 때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어머니가 하던 장사를 함께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977년 영장이 날아와 군 복무를 시작했다. 꼼꼼한 성격에 글씨를 잘 써 행정병으로 뽑힌 게 인생을 되돌아볼 기회를 줬다. 다른 병사들보다 책을 볼 기회가 많았다. 제대 후 뭘 하고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다 ‘한 우물을 파는 사람들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치를 따르기로 했다. 1980년 제대하자마자 수많은 국가대표를 배출한 강겸일 당시 서울 신중초교 수영 감독을 무작정 찾아갔다. 강 감독은 수영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체육교사로서 박상욱(대한수영연맹 총무이사)과 방준영(전 대표팀 감독), 이시은, 양정화, 김선희 등 당시 최고의 수영 선수들을 키운 지도자다. “월급 안 받아도 되니 제발 코치로 써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한 뒤 지도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독학으로 선수들을 키운 강 선생님으로부터 혼자서도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아이들 앞에서 항상 겸손하고 늘 책을 가까이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그때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새벽 동트기 전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성실하게 배웠기에 바로 강 감독의 인정을 받았다. 유망주 발굴에 관심이 많았던 강 감독은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은마아파트 근처 무궁화스포츠센터 지도자로 옮기며 노 감독도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곳을 떠날 때 노 감독을 스포츠센터 대표 수영 지도자로 남겼다.

○ 수영 천재와의 운명적인 만남


그곳에서 노 감독은 박태환을 만났다. 7세 때 엄마 손을 잡고 찾아와 “선생님 이것 드세요”라며 음료수를 건네던 수줍은 소년. 4세 때 천식 치료를 위해 박태환에게 수영을 시킨 박태환의 어머니가 노 감독이 어린 선수들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귀엽고 마른 몸매였다. 수영을 잘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물을 타는 솜씨가 좋았다. 수영은 물을 잘 타야 하고 물을 잘 잡아당겨야 한다. 박태환은 그 능력에선 천부적이었다.”

노 감독은 기본기 위주로 박태환을 조련했다. 박태환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소년체전에 출전해 자유형 5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노 감독은 2006년부터 대표팀을 맡으면서 이미 태극마크를 달고 있던 제자 박태환을 업그레이드시켰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m에서 한국에 사상 첫 금메달을 선사한 박태환은 노 감독의 ‘작품’인 셈이다.

수영을 지도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일까. 노민상 감독의 미소가 행복해 보인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노 감독은 “박태환은 천재형보다는 노력형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며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2009년 로마 세계선수권에서 단 한 종목도 결선에 가지 못해 엄청난 비난을 받은 뒤였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 준비를 위해 호주 전지훈련을 갔는데 100m를 1분 15초 페이스로 100번 수영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1분 15초 페이스 훈련은 100m를 약 1분에 수영하고 잠시 쉰 뒤 15초 안에 다시 출발하는 훈련이다. 스피드와 지구력을 키우는 인터벌 훈련의 일종이다. 당시 자유형 100m 한국 기록이 48초 후반대였으니 전속력의 약 90%에 해당하는 속도로 100m 수영 100번을 소화하는 훈련이었다.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1분 15초를 넘기지 않고 100번 소화했다.

“박태환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도 충분히 메달을 딸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저런 주위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어 안타깝다. 박태환을 잘 아는 사람이 전담 팀에 합류해 체계적으로 끌고 가면 2년 뒤 브라질에서도 충분히 메달을 딸 수 있다.” 더 잘할 수 있는 제자가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을 하고 있어 스승은 안타깝게 지켜볼 뿐이다.

노 감독은 고교 중퇴라는 ‘딱지’로 인해 온갖 차별을 받으면서도 최고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꿋꿋하게 버텨 세계를 제패했다. ‘수영도 못하는’ ‘학벌도 없는’…. 그를 향한 업신여김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강해졌다. “이대로 물러서면 내가 진 것이다”는 말을 반복하며 더욱 정진했다. 노 감독은 행정병 시절 배운 기록 정리 노하우를 바탕으로 세밀하게 기록하고 분석하며 박태환을 세계 최고로 만들었다. 처음 만나서 금메달 획득까지 훈련과 대회 출전 등 모든 기록을 정리한 ‘박태환 자료’만 수천 장이다.

대표팀을 맡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할 때였다. 유망주를 키우는 데는 자신 있었지만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들은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잘 몰랐다. 운동생리학과 스포츠심리학 등 스포츠과학 공부를 해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체육과학연구원 정동식 박사(한국스포츠개발원 원장)와 송홍선 박사, 송주호 박사 등을 쫓아다니며 공부했다. 해외 전지훈련을 나가지 않을 땐 밤낮없이 찾아가 떼를 써 가며 공부했다. 결국 스포츠과학을 활용해 선수들의 컨디션을 최고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배웠고 값진 올림픽 금메달을 일굴 수 있었다. “당시 참 귀찮을 정도로 많이 찾아왔다. 그 열정 때문에 설명해 주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었다”고 송홍선 박사는 회고했다.

‘금메달 감독’이 돼서야 비로소 수영인들의 인정을 받았다. 정일청 대한수영연맹 전무이사는 “노 감독은 수영계에서는 이단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기본기를 중요시하고 철저한 분석으로 박태환을 잘 키우면서 인정받게 됐다. 유망주 훈련에선 국내 최고다”라고 말했다. 요즘은 여기저기서 노 감독에게 유망주 훈련법에 대한 노하우를 청한다. 언제든 전수해 주고 있다. 인천 아시아경기가 끝난 뒤 10월엔 일본 도쿄에서 ‘박태환 금메달 조련법’과 ‘동양인도 할 수 있다’는 두 가지 주제로 전일본수영클럽협회가 주최하는 세미나에서 강연을 할 예정이다.

○ 대학교수보다 수영 바보가 좋더이다

노 감독은 ‘한국 수영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보여주기 위해 초심으로 돌아왔다. 선수들이 어릴 때부터 기본기와 기술, 정신력까지 차근차근 가르치고 싶었다. 18년 전 박태환을 처음 만나 그랬던 것처럼.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서울올림픽수영장에서 단 3개의 레인을 쓰며 제한된 선수만을 지도하고 있지만 유망주 발굴이란 꿈이 있어 그는 행복하다. 그는 2011년 1월 13일에도 다시 시작하는 자세로 대표팀 사령탑에서 내려왔었다. 큰 뜻을 품고 대학교수로 잠시 ‘외도’했지만 그는 다시 처음 그 자리를 선택했다. 코치 3명 월급 주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는 수영교실 감독. 100년에 1명 나올까 말까 한 ‘제2의 박태환’을 찾기 위해 그는 ‘수영 바보’ 노민상이 되기로 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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