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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리포트]상황판단 마비시키는 ‘안전 無知’… 반복교육으로 깨라

입력 | 2014-05-06 03:00:00

[세월호 참사/‘안전 대한민국’ 이렇게 만들자]
<6> ‘집단 위험 망각증’ 해부




192명이 희생된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의 발단은 한 50대 남성의 이상행동이었다. 그가 객차 안에 휘발유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붙이는 시늉을 하며 머뭇거릴 때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한 승객은 없었다. 대부분 당황해 라이터 불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열차와 불꽃의 결합이 어떤 참상을 초래할지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1년 반 뒤인 2005년 1월 서울지하철 7호선 열차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땐 승객들의 반응이 달랐다. 한 남성이 라이터로 광고 전단에 불을 붙이자 승객들이 소리를 지르며 옆 칸으로 대피했다. 승객들은 즉각 기관사에게 신고했고 다음 정거장에서 역무원들이 투입돼 불을 껐다. 그해 4월 지하철 4호선 전동차에선 라이터를 자꾸 켜대는 취객을 승객들이 제압해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 열차 안에서 라이터 켜는 행위를 대하는 태도가 대구지하철 참사를 계기로 바뀐 것이다. 대구지하철 화재 당시 승객들이 방화 기도에 소극적으로 반응했던 건 위험에 둔감해서라기보다 위험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 ‘안전 불감증’이 아니라 ‘안전 무지증’


우리는 대형 사고가 날 때마다 위험을 알고도 무시했다며 ‘안전 불감증’을 탓한다. 하지만 안전 심리 전문가들은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안전 무지증(無知症)’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무지가 불안감을 마비시킨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자인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진화론적으로 위험에 잘 대응해온 개체만 살아남기 때문에 인간 역시 위험을 망각하기보다 회피하려는 본능이 강하다”며 “다만 산업화로 눈에 띄지 않는 위험이 급격히 늘었는데 이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과 경고 시스템이 취약해 위험을 과소평가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기상관측 사상 가장 강력했던 태풍 매미. 2003년 9월 제주지역을 강타했을 때 최대순간 풍속은 초당 60m에 달했다. 전국에서 숨지거나 실종된 131명 가운데 바람이 가장 셌던 제주는 사망자가 2명에 불과했다. 오히려 풍속이 제주의 절반 정도였던 영남지역에서 104명이 숨졌다.

고대익 제주시 안전총괄과장은 “제주는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다. 간판이 날아다니고 가로수가 갑자기 쓰러지는 게 다반사여서 태풍 예보가 뜨면 시민들이 외출을 삼가고 대비를 한다”며 “지방정부도 태풍의 공포를 알기 때문에 건축 허가나 시설물 관리를 엄격히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면에 태풍을 자주 겪지 않았던 부산은 항구에 대형 크레인을 방치해놓았다가 전복돼 큰 피해를 봤다. 경남 마산 역시 별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해안 저지대가 침수돼 18명이 숨졌다.

올해 2월 부산외국어대 학생 등 10명이 사망한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 사고 때 건물 지붕에 50cm의 눈이 쌓였는데도 치우지 않고 행사를 진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리조트 측이 당초 하중에 취약한 샌드위치 패널로 건물을 짓고, 학교 측이 행사를 강행했던 것은 폭설의 위험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천장을 짓누르던 눈의 무게는 약 192t. 5t 트럭 38대를 지붕에 세워둔 셈이었다.

곽호완 경북대 심리학과 교수는 “어떤 위험이 올지 뻔히 알고도 방심한다기보다 뭐가 어떻게 위험한지 잘 모르거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데 다 안다고 착각해 필요한 만큼의 두려움을 빨리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위험을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해 화를 자초하는 건 외국도 다르지 않다. 2001년 미국 9·11테러 당시 뉴욕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는 항공기가 날아와 부딪힌 뒤 건물이 무너지기까지 102분의 시간이 있었다. 16분 뒤 또 다른 항공기가 남쪽 타워를 들이받았을 때도 바로 무너지지 않고 57분 뒤에야 갑자기 붕괴가 시작됐다. 비행기 충돌 때는 무사했지만 이 시간 동안 두 건물에서 대피하지 못해 사망한 사람이 전체 희생자 2749명 가운데 1500여 명에 달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이들 상당수가 ‘건물은 안전하다’ ‘각 층 상황에 따라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을 믿고 안에 머물러 있다 순식간에 최후를 맞았다고 보도했다.

건물 내 안전 담당자들이 붕괴 가능성을 직시하지 못했던 원인은 뭘까. 8년 전인 1993년에도 세계무역센터 건물은 테러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폭탄을 실은 승합차가 지하 주차장에서 폭발해 6명이 사망했지만 100층이 넘는 건물은 거의 손상이 없었다. 이때 경험이 8년 뒤 테러 공격을 당한 직후 ‘폭탄이 터져도 건물은 안전하다’는 오판으로 이어진 것이다.

○ 반복 교육과 훈련만이 안전 보장

사람은 대개 경험해보지 않은 위험에 대해선 과소평가하고 설사 위험이 오더라도 자기는 피해 갈 수 있다고 믿는 ‘통제의 환상’을 갖고 있다.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실제보다 낮게 평가하고 예상되는 피해에 대해선 구체적인 지식이 없어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위험의 전조가 보였을 때 정확한 상황판단 없이 평소 하던 대로 대응하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사례가 많다. 김정오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의 논문 ‘오류의 심리과정’(2005년)을 보면 전 세계 원자력발전소에서 일어난 사고 200건 가운데 매뉴얼에 명시된 필수 행위를 관행적으로 빼먹는 잘못이 원인이 된 게 42%에 달했다.

박창호 전북대 심리학과 교수는 “안전 예방대책은 일반인들이 일상행위에 내재된 위험을 잘 모른다는 전제에서 시작돼야 한다”며 “항공기 조종사나 승무원이 특수훈련을 받듯이 시민들도 위험의 실체를 몸으로 익힐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 형식적 민방위훈련… 84% “도움 안돼”

법으로 규정된 학교 안전수업… 초중고 10곳중 6곳 아예 안해

화마(火魔)에서 멀어지는 듯했던 그 길이 더 위험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때 불타는 열차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승객들이 향한 곳은 지상으로 연결되는 계단이었다. 연기는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당시 계단에는 유독가스가 밀집돼 있었다. 좁은 계단에 몰린 수백 명의 필사적인 몸부림은 서로의 다급한 발길을 붙잡았다. 이런 경우 지하철 선로로 대피하다 환기통로를 통해 빠져나가야 한다는 걸 알았더라면 희생자는 크게 줄었을 것이다.

위험이 생겼을 때 막연한 상식에 의존해 반사적으로 하는 행동은 도리어 화를 키울 수 있다. 안전교육이 선택이 아닌 필수여야만 하는 이유다. 하지만 일반인뿐 아니라 안전담당자 교육마저 부실한 실정이다. 감사원이 지난해 서울시 등 10개 지방자치단체 재해담당 공무원의 방재교육 이수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의무교육 이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47.4%, 가장 낮은 곳은 11.1%에 불과했다.

민방위훈련도 유명무실하다. 한남대 행정정책대학원 ‘민방위 교육훈련의 개선방안’ 논문을 보면 훈련생 설문 결과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는 답변이 83.9%에 달했다. 김현택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경험을 통해 몸에 새겨져야만 평소에도 위험 요인을 잘 의식할 수 있고 사고 때 적절한 대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어려서부터 안전을 생활화하는 교육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많지만 학교에서의 안전교육은 파행을 면치 못하고 있다. 법에 규정된 안전 보건 수업을 실시한 초중고교는 전체의 36.4%(2013년)에 불과했다. 교육이 이뤄지더라도 교사들이 비전문가여서 매뉴얼만 읽어주는 수준에 그치는 게 다반사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안전 관련 내용 비중도 36쪽에서 8쪽으로 크게 줄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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