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원 정치부 차장
2001년 9·11. 미국 역사상 첫 본토 공격 사실을 알고도 조지 W 부시는 오후 7시가 돼서야 백악관 뒷마당으로 돌아왔다. 첫 육성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 것은 오후 9시였고, 뉴욕 ‘그라운드제로’를 찾은 것은 사흘 뒤인 9월 14일이었다.
뉴욕소방관의 어깨를 짚고 세계무역센터의 잿더미에 선 부시에게 물병이 날아들지도 야유가 쏟아지지도 않았다. 어느새 폐허 속에는 성조기가 꽂혔고 모든 이들은 “유에스에이(USA)”를 연호했다. 그러고는 기적이 일어났다. 51%였던 부시의 지지율은 단숨에 90%를 찍었다. 북한이 아니고서는 기대할 수 없는 꿈의 숫자. 바로 국가위기결집(rally around the flag) 효과였다.
사고 발생 이틀째인 17일 진도 실내체육관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국가 지도자로서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을 보았다. 부정확한 정보로 초기 상황에 대해 오판했지만 우왕좌왕하는 공무원, 전전긍긍하는 해경, 극도의 불안상태에 빠진 실종자 가족들 사이에서 나름의 위기관리 능력을 입증했다. 하지만 대통령 옆에 선 김기춘 비서실장의 초조한 눈빛은 볼썽사나웠다. 무슨 대단한 조언을 한다고 귓속말을 속삭였는지도 알 수 없다.
불행한 일이지만 그날 이후 우리에겐 국가 지도자도 정치도 보이지 않았다. 언뜻 들으면 추상같기도 한 대통령의 사자후가 간간이 들렸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깃발 아래 온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울림은 없었다.
여야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고작 내놓은 대책도 ‘말조심’이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글쓰기를 자제하고 술(특히 폭탄주)과 골프를 삼갈 것이며, 사람들이 보는 데서 히죽히죽 웃지 말라는 세부지침도 줬다. 봉숭아학당이 따로 없다. 이것도 어려운지 정치인들의 헛발질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고 있다.
세월호가 쓰러진 지 12일째.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꿈틀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쉬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6·4지방선거 모드로 전환해도 된다는 감(感)이 왔는지….
지금 국민은 국가 지도자들과 정치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준엄하게 묻고 있다. 온 국민이 눈을 부릅 뜬 가운데 300명 넘는 생명의 수장을 수수방관한 국가의 무능력을 어찌할지. 47m 수심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대한민국에 아직도 희망이 있는지를….
하태원 정치부 차장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