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 정여울씨 초청 강연
정여울 작가는 “여행은 결국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문학평론가 겸 여행작가인 정여울 씨는 22일 저녁 대전 서구 둔산동 박성일한의원에서 열린 전국적인 독서모임 ‘백북스’ 초청 강연에서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세상에는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재산, 지위, 외모, 타인의 평가 등)과 ‘나에게 달려 있는 것’(지혜 열정 우정 사랑 등)이 있다고 했다”며 여행의 의미를 이렇게 간추렸다. 그가 최근 출간한 ‘내가 사랑한 유럽 톱 100’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세월호 참사를 감안해 이날 강연은 차분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정 작가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여행에서 더욱 많은 것을 보고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길을 잘 몰라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던 경험을 소개하며 ‘뜻밖의 조우’를 즐기라고 했다. “우리는 사전 준비에 대한 강박 관념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거나 ‘계획한 만큼 얻을 수 있다’고만 믿기 때문이다.”
정 작가가 최근 갖게 된 여행 취향의 하나는 관심사를 좇는 ‘테마여행’이다. 헤르만 헤세의 삶이 궁금해져 그의 궤적을 수년째 찾아 나서고 있다. 얼마 전에는 카를 구스타프 융(정신분석학자)과 교류한 헤세가 그림을 그리면서 우울증으로 힘들었던 시간을 보낸 스위스 몬타뇰라를 찾아가 작가의 정신세계를 더듬었다.
혁명가 같은 삶을 살았던 신학자 이반 일리치의 무덤을 방문했을 때의 숙연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오래 머문 곳이 없는 그가 남긴 유일한 흔적은 독일 브레멘의 무덤이었다. 현지 택시운전사도 물어물어 안내했다. 나무 십자가만 덜렁 걸린 무덤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을 모두 버린 삶을 보여주었다.”
요즘 정 작가를 매료시킨 또 하나의 여행 취향은 ‘현지인 되어보기’다. “지난해 여름 독일 베를린에서 방학을 맞아 유학생이 임대한 방을 빌려 한 달 동안 살아봤다. 하루에 한 나라씩 도는 메뚜기씩 패키지여행은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곳에 오래 머물면 그곳 주민들이 보여주려는 삶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를 볼 수 있다.”
그는 아름다운 장관을 갖고 있는 관광지보다 다소 척박하고 갖춰지지 않은 여행지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때가 있다고 했다. 행복한 도시는 주민들이 자신의 삶을 남의 판단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는 곳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